마취과 의사로서의 기쁨

중앙일보

입력

내가 만나는 환자는 늘 잠들어 있다.
몸이 불편한 환자라면 흔히 있음직한 불평의 말도, 어디가 아프고 불편하다는 말도 한마디 하지 않는다.

다른 과 동료들은, 환자나 보호자들과의 사이에서 가끔씩 생기곤 하는 의사에 대한 불만과 치료에 대한 불신의 말로 힘들었던 기억들을 내게 말하며, 마취과 의사는 환자·보호자를 대할 일이 없어서 마음 편하겠다고도 한다. 하지만...

인턴시절. 익숙하지 않은 일들 속에 묻혀 바쁘게 뛰어다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욕창으로 푹 패여진 살을 드레싱하는 나에게 환자분이 환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치료를 마치고 돌아서는 나에게 슬그머니 음료수 한 병을 쥐어 주었다.

“선생님 수고했어요”라는 환한 인사와 함께...
“아, 이런 기분에 의사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환자를 대하며 느끼는 이런 작은 기쁨들.

마취과 레지던트가 된 후 불평을 토로하는 보호자도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도 없다. 하지만 인턴시절 환자를 대하면서 느끼던 그런 작은 기쁨도 사라져 버렸다.

“마취는 주사만 놓으면 되는 거 아니예요?”라고 말하는 환자에게 난 참 무의미한 존재였다.
함들게 최선을 다하여 환자를 돌본 뒤에도“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해 주는 환자는 아무도 없었다. 열심히 일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생체 징후가 불안정하고 문제점이 많은 환자를 열심히 돌본 후 수술실을 나갈 때 환자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내 기분이 뿌듯하고 즐거워진다.

그리고 며칠 후 병실에 가보았을 때 환자의 상태가 더 좋아져 있으면 나는 나 자신에게 수고의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환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마취된 환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내가 소홀히 돌보는 환자는 꼭 내게 불평을 한다. 맥박이 불안정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열심히 지켜보며 적절히 돌보는 환자는 안정된 모습으로 내게 편안함을 전해 온다.

반드시 깨어있는 환자와 말로서만 대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난 오늘도 잠들어 있는 환자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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