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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색깔' 짙어진 패전일 추도사...‘역사’가 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8월 15일 태평양전쟁 패전(일본에선 종전)을 기념하는 아베 신조(安倍信三) 총리의 추도사에서 ‘역사’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역사의 교훈 깊이 가슴에 새기고" 표현 빠져 #'적극적 평화주의' 언급, '아베 색깔' 짙어져 #나루히토, 6년 연속 "깊은 반성'... 선왕 답습

지난 15일 도쿄도 치요다(千代田)구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아베 총리는 추도사를 발표했다. 2019년 추도사에서 “역사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라고 했던 부분이 올해는 “세계를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로 바뀌었다.

이 부분은 2012년 아베 총리가 재집권한 이후 지난해까지 “역사와 겸허히 마주하고”, “역사를 직시해 늘 겸양을 잊지 않고”,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기며” 등으로 표현돼왔다. 그러나 올해부턴 아예 이 구절이 없어진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5일 도쿄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5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식사(式辭)를 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적극적 평화주의 기치 아래 국제사회와 손잡고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과제 해결에 지금 이상으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결의"라고 말했다. [교도=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5일 도쿄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5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식사(式辭)를 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적극적 평화주의 기치 아래 국제사회와 손잡고 세계가 직면한 다양한 과제 해결에 지금 이상으로 역할을 다하겠다는 결의"라고 말했다. [교도=연합뉴스]

“역사의 교훈” 표현 처음으로 사라져 

아사히 신문은 16일 1면 기사를 통해 “아베 총리의 추도사에서 ‘역사의 교훈’이 사라졌다”면서 “전후 75년을 맞는 메시지에 ‘아베 색깔’이 배어 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또 ‘가해와 반성’에 대해서는 8년 연속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가사키·히로시마 원폭, 도쿄 공습 등 자국의 피해만을 나열하며 “가열했던 지난 대전(大戰)에서 300만명 넘는 동포가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는 중앙일보에 “가해에 대해 반성과 애도의 뜻을 표명하지 않고, 부전(不戰)의 맹세를 말하지 않고, 국민의 끊임없는 노력을 말하지 않는다는 소위 ‘아베 3원칙’이 이번에도 그대로 지켜졌다”고 지적했다.

대신 올해 아베 총리의 추도사에선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단어는 2013년 아베 총리가 집단자위권 행사를 용인하는 헌법해석 변경을 시도하며 국가안전보장전략(NSS) 전문가 회의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아베 정권의 외교·안전보장 방침을 표현하는 단어다.

‘적극적 평화주의’ 첫 등장... 아사히 “위태로움 금할 수 없어” 

그러나 이는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전수방위(專守防衛·공격을 받았을 때만 방위 차원의 공격만 행사) 원칙의 현 평화헌법과 부딪힌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는 용어로,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에서 이 단어를 언급한 데 대해 일본 언론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도쿄신문은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국회 연설 등에서 여러 번 언급하는 등 지금까지 (아베) 정권이 밀어붙인 안보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이용된 용어”라고 지적했다. 아사히 신문은 사설에서 “아베 총리는 미래지향을 강조했을지 모르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일부 용인이나 무기수출 3원칙 폐기 등이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 아래서 진행된 것을 생각하면 위태로움을 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대표도 "아베와 공명당 연립정권은 전후 우리나라가 키워온 입헌주의, 평화주의를 위협하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런 행동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15일 도쿄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5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15일 도쿄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 열린 태평양전쟁 종전(패전) 75주년 '전국전몰자추도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일왕 이례적 코로나19 언급...전후 세대 일왕의 독자성? 

일왕의 추도사에서 6년 연속으로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나루히토 일왕은 선왕인 아키히토 일왕의 추도사와 거의 같은 추도사를 발표했다. 일왕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이례적인 것은 일왕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언급한 것이다. 일왕은 “새로운 고난에 직면하고 있다”며 “이 곤란한 상황을 극복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일왕이 패전기념일 추도사에서 전쟁 이외의 사안을 언급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세바타 하지메(瀬畑 源) 류코쿠(龍谷)대 교수는 중앙일보에 “추도식 때 사회정세를 언급한 것은 매우 놀랍다. 동일본 대지진 때조차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요미우리 신문은 “전후 세대 일왕의 독자성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그동안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서도 일왕은 별다른 메시지를 내지 않았다. 일왕은 헌법상 정치적 행위가 금지돼 있지만, 선왕인 아키히토 일왕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6분짜리 영상 메시지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 행보를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때문에 이번 발언은 이를 의식해 나온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아베 3원칙' 따른 추도사... 일왕 '깊은 반성' 답습”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본인 제공]

박진우 숙명여대 일본학과 교수 [본인 제공]

2012년 아베 2차 집권 이후 소위 ‘아베 3원칙’이 올해 추도사에서도 지켜졌다.

첫째, 아시아 국민들에 대한 가해에 대해 반성과 애도의 뜻을 표명하지 않는다. 둘째, 부전(不戰:전쟁을 하지 않는다)의 맹세를 하지 않는다. 셋째, 전몰자의 희생 위에 ‘평화와 번영’이 있다는 점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일본 국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일왕의 추도사에선 매번 나오는 말)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루히토 일왕은 ‘깊은 반성’을 언급함으로서 아키히토 일왕이 30년간 구축한 내용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다. 일면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주의를 계승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주변 아시아 국가 2500만명의 희생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아베 총리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일왕이 말하는 ‘지난 대전(大戰)’은 태평양전쟁 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의미하지만 그 이전의 중·일전쟁, 만주사변 등 침략전쟁은 간과하고 있다. 천황제와 과거의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다.

나루히토 일왕의 발언은 최소 10년을 지켜보면서 아키히토 일왕과의 공통점, 차이점을 확인해야 한다.

세바타 하지메(瀬畑源) 류고쿠대학 법학부 준교수

세바타 하지메 류고쿠대 준교수 [본인 제공]

세바타 하지메 류고쿠대 준교수 [본인 제공]

추도사에서 코로나에 관한 메시지를 넣은 것은 매우 놀랍다. 지금까지 추도식 때 사회정세를 언급한 경우는 없었다. 동일본대지진 때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재해지 위문 등에 적극적이었던 아키히토 일왕과 달리, 나루히토 일왕이 코로나 사태 속에서 왜 침묵하고 있는가라는 시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일본대지진 같은 자연재해는 ‘끝’이 있지만, 코로나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많은 사람이 모일 경우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지 방문이나 격려도 쉽지 않다.

정부 대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은 가운데 정치적 행위가 금지된 ‘상징천황’으로서 메시지를 내기 어려운 점도 있다. 때문에 추도식 때 짧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표현으로 메시지를 내는 이례적인 방식을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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