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칼럼

또 하나의 기회, 우크라이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오렌지 혁명'의 우크라이나.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나라 중에서 가장 알짜배기 국가일 뿐더러 최근 들어서는 부정선거를 뒤엎은 민주화 바람으로 한층 유명해졌다. 더구나 떠오르는 흑해 경제권의 중심 국가로서 카스피해 나라들과 함께 21세기의 '뜨는 나라'로 세계의 기대를 모아 왔었다. 그러나 웬걸. 혁명이 성공하기는커녕 최근 들어서는 극심한 정치 혼란을 빚어내는 나쁜 뉴스만을 쏟아내 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수도 키예프에서 때마침 벌어지고 있는 정쟁(政爭)의 현장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오렌지 혁명의 주인공 유셴코 대통령의 하늘을 찔렀던 인기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선거 패배에 이어서 연정계획마저 무산되자 망신살이 뻗친 셈이 됐다.

물고 물리는 요란한 정치싸움은 한국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우크라이나에 와보니 정쟁의 세계 챔피언은 바로 이들이었다. 영.호남 지역 갈등 문제도 우크라이나의 동서 대립하고는 비교 상대조차 못됐다. 한강보다 더 큰 드네프프강을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서 벌여온 해묵은 동서 갈등은 나라를 둘로 쪼개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했고, 러시아와 서방이 벌이는 보이지 않는 전쟁도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런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이 언제 어떻게 가실지에 대해 누구한테 물어도 허사였다.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했다. "유셴코 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국민 통합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분열을 더 조장하고 갈등을 키웠기 때문에 인기가 폭락한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였다. 다름 아니라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업적을 자평하면서 스스로 고백한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 아닌가.

어쨌든 경제가 모든 걸 말해 준다. 유셴코 대통령의 실패도 경제 성적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정적이었던 쿠치마 대통령 집권 말기의 경제성장률이 9.6%(2003년), 12.1%(2004년)였으나 집권 첫해인 지난해에는 2.6%로 급락했으니 말이다. 올해 경제도 비슷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최근 집계에 따르면 성장률이 5%대로 회복되고 있다지 않은가. 전문가들의 해석이 재미있다. "정치인들이 권력싸움에 정신이 팔려 경제에 간섭을 덜 하는 바람에 요행히 경제가 시장의 힘으로 저절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불안이 경제에는 독(毒)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모를 리 없다. 특히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데는 최대 장애 요인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물어 왔다. "한국도 정치가 불안하고 더구나 북한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어떻게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는가."

다행인 것은 정치가 엉망진창임에도 경제가 중요하다는 인식의 확산은 분명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부러워했고, 한 수 지도를 절실히 원했다. 정권 향방에 상관없이 여러 나라와 갖가지 비즈니스가 추진되고 있었다. 잠재력이나 가능성으로 치면 세계 최상급임에 틀림없다. 미사일 제조기술을 비롯해 항공산업.핵발전소 관련사업 등에 있어서는 오래전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왔던 터다.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서 소련의 빵을 공급해 왔던 나라다. 또한 철광석을 비롯한 풍부한 자원 보유국인 데다가 중앙아시아에서 서유럽으로 가는 기름과 천연가스가 대부분 우크라이나를 통해야 하며,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흑해 경제권의 중심국이 우크라이나다. 미국 대사관 직원이 무려 700명이라는 사실이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한국 대사관은 구멍가게 같은 건물에 직원은 불과 20명이란다. 또 하나의 기회의 나라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 관심은 고작 그 정도인 것 같다.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