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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외교관 성추행 의혹, 외국 정상이 말할 때까지 뭐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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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재인 대통령과 외국 정상 간 통화에서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의혹이 거론되는 한심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28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우리 고위 외교관의 현지 직원 성추행 의혹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밝힌 아던 총리의 발언 내용은 대부분 덕담이다. 성추행 의혹 문제는 마지막에 “(양측이) 의견을 나눴다”고만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 하지만 이번 통화가 뉴질랜드 측 요청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던 총리가 성추행 의혹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했을 공산이 크다.

뉴질랜드 총리, 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이례적 언급 #해당 외교관 숨기지 말고 정당한 심판 받도록 해야

정상 간 통화에서 특정인의 비리가 거론되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이 통화에서 고위 외교관의 성추행 의혹과 이와 관련된 한국 측 협조 문제가 논의됐다면 그 자체가 국제 망신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사건은 성추행을 당했다는 현지 남자 직원과 외교관 간의 주장이 크게 엇갈린다. 현 단계에서 정확한 진상을 가리기도 힘들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그간의 외교부 행태를 보면 성 비위 척결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뉴질랜드 현지 언론에 따르면 우리 대사관은 현지 사법당국의 수사에 거의 협조하지 않았다. 진상조사 차 사건 당시의 CCTV 녹화 파일 등을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은 적절치 못한 대응이었다.

이번 뉴질랜드 총리의 통화로 특별한 관심을 끌게 됐지만 외교관의 성 비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7년 에티오피아 대사의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자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무관용 원칙’을 밝히며 성 비위를 척결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성 비위가 줄어들기는커녕 캄보디아·파키스탄·일본 등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지난 10년간 외교부에서 110건의 비리 사건을 징계했는데 이 중 72건이 문재인 정부 때 적발됐다고 한다. 이렇듯 해이해진 외교부의 기강을 다잡지 않으면 성 비위 사건은 어디에서든 또 터질 게 분명하다.

외교부는 문제의 외교관이 뉴질랜드 측 조사에 응할지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발뺌해 오다 정상 간 통화로 새삼 문제가 되자 뒤늦게 본격 대응에 나서고 있다. 선제적으로 성 비위 사건을 차단하겠다던 외교부의 공언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2014년 뉴질랜드에선 말레이시아 외교관의 성폭력 미수사건이 터진 적이 있다. 당시 이 용의자는 외교관의 면책을 내세워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말레이시아 정부가 뉴질랜드 측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돌려보내 재판을 받게 했다. 이런 터라 우리 정부가 성추행 의혹을 받은 외교관을 계속 감싸고 돌면 뉴질랜드 국민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국격이 달린 문제인 만큼 성추행 혐의를 받은 외교관이 공정하고 정당한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이고 성 비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관철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