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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람사전

생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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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철 카피라이터

정철 카피라이터

머릿속에 있는 것. 아직 꺼내지 않은 것.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꺼내서는 안 되는 것. 한 문장이 어렵다면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니 그곳에 그대로.

『사람 사전』은 ‘생각’을 이렇게 풀었다. 생각은 가능성이다. 머릿속을 유영할 때까지는 가능성이다. 김수영의 문장이 될 수도, 정태춘의 노랫말이 될 수도, 노무현의 연설이 될 수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러나 생각이 조급을 만나는 순간 가능성은 부서지고, 그 파편들은 설익은 형태로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입을 통해 나오는 그것을 말이라 하고, 손끝을 통해 나오는 그것을 글이라 한다. 조급에게 등 떠밀려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그것들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된다. 누구에게도 감흥을 주지 못하는 글이 된다.

사람사전 7/22

사람사전 7/22

글은 그나마 기회가 있다. 생각을 종이 위로 옮기는 동안 수십 번 정제가 허용된다. 지우개의 도움을 잘 받으면 펑퍼짐한 생각이 제법 뾰족한 생각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말에겐 기회가 없다. 일수불퇴다. 말(言)은 달리는 말(馬)을 닮았다. 경마장 말처럼 문만 열리면 튀어나가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니 혀끝에서 말이 꿈틀거릴 땐 무심코 입을 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입을 벌리는 순간 녀석은 이미 누군가의 귀에 도착해 있을 테니. 웬만하면 하품도 금지.

잘 익은 누군가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기다림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생각도 시간을 먹고 어른이 된다. 좋은 말도 시간이 하고 좋은 글도 시간이 쓴다.

정철 카피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