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살인, 외면해선 안 될 것" 15년 돌본 딸 살해한 70대 엄마 항소심도 집행유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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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중앙포토]

사진은 기사와 직접 관계 없음. [중앙포토]

“피고인 A씨, 오셨나요.”

10일 오전 서울고등법원 법정. 재판부의 물음에 방청석에 앉아있던 A(70)씨 가족이 “나가시면 된다”며 A씨를 피고인석으로 보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재판부의 말에도 가만히 있던 A씨는 헤드셋을 끼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말에 “네”라고 답했다.

지난해 9월 A씨는 사람을 죽였다. 피해자는 자신이 15년간 돌봐온 48세 딸이었다. 당시 A씨는 딸, 남편과 함께 살았다. 딸은 2004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2012년에는 고관절이 부러져 혼자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남편과 함께 딸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딸을 챙겨온 A씨는 오랜 병간호로 우울증과 불면증을 겪기도 했다. “딸을 죽이고 나도 죽어야겠다”며 어려움을 주변에 호소해온 A씨는 남편이 외출한 사이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올해 1월 1심을 맡은 인천지법 형사12부(재판장 송현경)는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야 할 가장 존엄한 가치인 생명을 뺏는 살인죄는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거나 용납될 수 없다”고 A씨의 죄가 가볍지 않다고 봤다. 또 A씨와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범죄가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A씨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다른 한 편의 사정도 참작했다. A씨의 남편은 A씨가 딸을 돌보는 과정에서 겪은 고통이 매우 컸다고 공감했다. 다른 가족들도 A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선처를 부탁했다. A씨는 자신이 죽으면 딸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해 딸과 함께 죽을 생각을 했고 범행 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거동이 어려운 환자를 적절히 치료할만한 시설이나 제도적 뒷받침이 현실적으로 충분치 못한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면, 비극적인 결과를 오롯이 A씨의 책임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고 판결했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사건을 받은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는 A씨 사건에서 두 가지 대립하는 사정을 두고 고심했다. 모든 사람이 오랜 간병 생활을 한다고 해서 A씨 같은 선택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15년간 딸을 병간호한 A씨에게는 자신이 계속 딸을 돌보는 것 외에 어떤 대안도 제시된 적 없었다. 재판부는 “결론을 내리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1심 판단에 대해 검사는 양형이 부당하다는 점을 이유로 항소했다. 비슷한 범죄가 또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항소심은 “A씨의 여러 사정을 살필 때 1심의 형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우리 사회가 간병 살인이라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간병 가족의 아픔과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이유를 밝혔다. 선고가 끝난 뒤 A씨는 “다 끝났어요”라는 가족의 안내에 따라 법정을 나갔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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