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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일으킨 마오, 배불린 덩샤오핑, 강대국 만든 시진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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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중국 공산당이 걸어온 ‘100년’

오늘(7월 1일)은 중국 공산당의 창당 99주년 기념일이다. 중공이 제시한 전략적 목표인 ‘두 개의 백 년’의 첫 번째 100년에 해당한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2017년 19차 당 대회에서 2020년까지 인민들의 민생문제를 해결해 절대 빈곤인구를 없애는 전면적 소강(小康)사회 실현을 다짐했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중공이 100년 동안 걸어왔던 길의 성공을 경축하는 시진핑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신민주주의 혁명 30년과 #사회주의 건설 30년 통해 일어섰고 #개혁개방 30년으로 부유해졌으며 #중공 100년 앞두고 전환 맞고 있어

중공은 1921년에 창당했지만, 5·4운동부터 비롯됐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중화민족이 처한 위기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탄생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기념해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인민영웅기념비에 3년간의 내전과 30년간의 인민해방전쟁 그리고 1840년이라는 세 개의 시기를 명기한 이유다. 중공의 100년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근대로부터 출발함을 의미한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세계의 중심이자 유일한 문명에서 ‘동아시아의 병자’인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부강한 중국과 중화의 회복은 중국이 당면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전통과 근대, 서구와 중화의 융화를 꾀했던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은 실패했다. 그 결과 전통 질서에 대한 부정과 서구적 공화주의를 주창했다. 신해혁명으로 2000여 년 이어진 황제체제를 전복시켰다. 하지만 신해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 전통 중국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고 민주와 과학이라는 서구적 가치로 중국을 재구성하는 신문화운동이 발생했다. 때마침 발생한 러시아 혁명이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했다. 5·4운동을 계기로 러시아 혁명을 모델로 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됐다.

마오쩌둥 “중국 인민이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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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회복을 위해 중공이 마주한 과제는 분열된 중국의 통합과 외세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불과 50여 명으로 출발한 중공으로서는 힘겨운 과제였다. 그래서 창당부터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한편, 공화주의 혁명세력인 국민당과 협력했다. 중공은 국가의 통합과 항일을 위해 국민당과 협력했지만 다른 목표로 인해 대립했다.

한편 중공의 성장은 소련의 지원과 지도 아래 이루어졌지만 소련과는 다른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이 필연적이었다. 때문에 중공의 성장은 국민당과 협력과 대립의 반복 과정이자 소련 공산당으로부터 독립과 중국적 혁명노선의 모색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체제와 마오쩌둥 사상이 확립됐다. 국민당과 3년 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공은 초기 30년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마오쩌둥의 표현대로 “중국 인민이 일어섰다.”

1949년 반식민지로부터 해방됐지만 여전히 빈곤하고 후진적이었다. 반(反)전통을 주창했지만 전통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측보다 이른 해방과 이듬해 한국전쟁에 개입해 세계 최강 미국에 거둔 ‘승리’는 과도한 낙관주의가 충만하게 만들었다.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보고로 소련 사회주의의 한계가 폭로되자 중국적 사회주의 건설 모델에 대한 모색을 시작한다. 중국은 사회주의로 ‘달려가’ 1956년 사회주의 진입을 선언했다. 1958년 공산주의로 대약진을 시작해 내일이라도 공산주의가 실현될 것처럼 여겼다. 대약진운동이 수천만 명의 비정상적 사망자를 초래했지만 혁명의 이상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문화대혁명이다.

문혁은 공자를 “최고의 후레자식”이라 했듯이, 반전통주의의 정점이자 이상주의적 실험이었다. 문혁이 마오쩌둥을 신격화하고 황제적 권위를 부여하면서, 중국이 전통의 질곡과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역시 보여줬다. 문혁의 종결은 1957년 이후 급진적이고 이상주의적 발전 전략의 실패, 1949년 이후 선택한 소련식 발전 모델의 한계를 보여줬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핵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을 일컫는 ‘양탄일성(兩彈一星)’으로 자위력을 갖추고 국가는 일어섰다. 그러나 공산주의 실현은 물론 근대적 계몽조차도 요원한 미래였다.

인민의 삶의 질 개선과 새로운 계몽을 위한 발전노선의 근본적 전환이 개혁개방이다.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견지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면서도 사상해방과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 경제를 도입했다. 서구 발전노선에 대한 긍정이자 전통적 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대한 근본적 전환이었다. ‘청사진 없는 개혁’ 혹은 ‘돌다리를 두들겨 가며 건너기’라는 중국의 개혁개방 방법은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했다. 그렇지만 소련 동구 변동의 와중에 발생한 1989년 천안문사건은 중국의 개혁개방이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사회주의 견지를 전제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력도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사회주의 견지하며 시장 경제 도입

중국은 개혁 과정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통해 세계 경제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제조차 인정했다. 중국에는 공산당 일당 통치 외에는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남지 않았다. 소련 동구 사회주의의 해체에 따른 지구적인 사회주의 이념의 퇴조에 따라 이상으로서 사회주의는 매력을 상실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공자로 상징되는 전통과 역사가 다시 소환됐다.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 공산당 일당 유지, 그리고 전통의 부활이라는 상호 모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전통을 부정하는 혁명, 혁명을 개조하는 개혁개방, 전통의 부정에 대한 부정까지 통합하는 중국의 재구성을 의미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2010년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하는 등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부유해졌다.

개혁개방 30년을 지나며 중국은 비약적으로 성장한 데 비해 미국은 위기를 맞았고 극우의 부상으로 서구의 보편적 가치는 취약해졌다. 서세동점의 근대가 종언을 고하고 세계 질서가 변화되는 “백년에 없는 대변동의 국면”이다. 대변동 속에서 중공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중국의 발전 경로·이론·제도·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말한다. 중국이 일어서고, 부유해지는 시기를 지나 강해지는 시기에 들어섰다는 주장이다. 강해지는 시기는 중국이 세계의 발전을 위한 중국적 대안과 중국적 보편을 제시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시대를 의미한다.

중국은 중공이 이끄는 신민주주의 혁명 30년과 전통적 사회주의 건설 30년의 굴절을 겪으며 일어서고, 개혁개방 30년을 통해 부유해졌으며, 중공 100년의 마지막 10년을 즈음해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시진핑은 이 전환을 강해지는 시대라고 했다. 세계에 중국적 실천을 통해 형성된 중국적 방법과 표준을 제시하고 중국이 세계를 이끄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신시대’이다.

중국적 대안 제시해 세계 이끌 것

신시대는 근대와 전통의 화해는 물론 서구의 쇠락과도 관련된다. 중국의 실천을 통해 형성된 중국적 방법과 표준을 제시해 중국이 세계를 이끄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은 신시대의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신시대는 아편전쟁 이후 역사의 전환이기도 하다. 중국의 실천이 중국을 부흥시켰지만 그것이 새로운 보편을 만들어 낼지는 의문이다. 중공의 실천에는 근대의 치욕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혁명의 선혈, 사회주의 건설과 개혁의 땀방울과 더불어 천안문의 기억, 티베트·신장(新疆)·홍콩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전면적 개혁 심화의 필요성과 어려움을 “먹기 좋은 고기는 다 먹고, 남은 것은 씹기 어려운 단단한 뼈다귀뿐”이라고 묘사했다. 창당 100년을 지나고 건국 100년을 향해 남아 있는 30년은 세계를 이끄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새로운 여정이다. 그것은 마오쩌둥의 국가 건설을 위한 “베이징 입성 시험”이나 “인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한”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30년 실험은 물론 전면적인 개혁 심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길이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시진핑이 선택한 방법은 집권과 집중과 권위주의라는 “오래된 길”이다. 그러한 “오래된 길”은 미국과 서구 민주주의의 쇠락·후퇴와 함께하는 퇴보를 위한 경쟁이다. 중화가 중국의 힘만이 아니라 주변이 흠모(欽慕)하게 하는 은덕과 문화의 귀결이었다면, 그러한 “오래된 길”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안치영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 『덩샤오핑 시대의 탄생』(창비, 2013) 등이 있다. 올해 3월 인천대 중국학술원장에 취임했다.

안치영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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