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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센카쿠·홍콩보안법에 휘청이는 중·일 ‘유사 허니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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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미·중 신냉전과 중·일 관계

신경진 중국연구소장

신경진 중국연구소장

중국의 ‘늑대 외교’가 일본 앞에서만 순해지는 두 장면.

“미국은 동맹국, 홍콩보안법 반대” #아베, 미·중 사이에서 가치외교 기치 #자민당은 시진핑 방일 반대 결의 #중국은 센카쿠 인근 일본 영해 진입

#1. 지난 5월 25일 아베 신조(安培三晉) 일본 총리의 공식 기자회견장. 월스트리트저널(WSJ) 특파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팬데믹이 미·중 대립을 격화시켰다. 일본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아베 총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세계 각지로 확산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일본의 유일한 동맹국이다. 일본은 자유·민주·기본인권·법의 지배라는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으로 미국과 다양한 국제 과제를 협력하겠다.”

국수주의 성향의 중국 환구시보가 다음날 우호적인 사설을 실었다. “중국인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모호한 어휘를 사용해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세계로 ‘확산’했다며,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강조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례적이다.

#2. “중국은 일본 일부의 반중(反華) 표현을 상대할 시간도 흥미도 없다.”

지난 3일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말이다. 이날 일본 집권 여당 자민당 내 외교 소위가 홍콩 국가안전법(홍콩보안법) 시행을 이유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일본 국빈방문에 사실상 반대를 결의한 직후 나온 반응이다. ‘늑대 전사(戰狼)’로 이름난 자오 대변인답지 않게 표현을 순화했다.

결의안은 당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전달될 예정이었지만 불발됐다. 정책위의장 격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정조회장이 막았다. 6일 자민당 내 추가 격론이 펼쳐졌다. 친중파 원내총무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간사장이 반발했다. 향후 해법은 외교 소위 대표에게 일임했다.

롤러코스터 탄 일본의 대중 호감도

중·일 관계가 냉랭하던 2016년 9월 항저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을 계기로 열린 중·일 정상회담장 모습이다. 회담장 탁자에 양국 국기조차 없이 생수만 놓여 있다. [중앙포토]

중·일 관계가 냉랭하던 2016년 9월 항저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을 계기로 열린 중·일 정상회담장 모습이다. 회담장 탁자에 양국 국기조차 없이 생수만 놓여 있다. [중앙포토]

중국의 일본 예외론 배경에는 시 주석의 일본 국빈방문이 자리한다. 코로나19로 우한(武漢)과 후베이(湖北)성이 전면 봉쇄됐던 지난 2월 6~7일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의전장(禮賓司長·예빈사장)과 선발대가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했다. 도쿄의 영빈관이 위치한 모토아카사카(元赤坂)와 고베(神戶)시를 둘러봤다. 2008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국빈 방일 이후 12년 만의 준비였다.

같은 달 29일 양제츠(楊潔篪) 중앙외사위원회 판공실 주임이 도쿄를 방문했다.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국가안전보장국장을 만나 고위급 정치 대화 채널을 복원했다. 다음날 아베 총리를 만나 시 주석의 국빈 방문을 논의했다.

지난해 6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열린 오사카에서 벚꽃이 필 때 도쿄를 찾겠다던 시 주석의 다짐은 3월 들어 연기됐다. 자오 대변인은 3일 “중·일은 중대한 의제를 토론하지 않는다”며 시 주석 방일 논의가 중단됐음을 공식화했다. 코로나19가 이유지만 일본 국민의 악화한 대중 여론이 더 큰 이유로 알려진다.

일본 국민의 중국에 대한 친근감

일본 국민의 중국에 대한 친근감

올해로 수교 48주년을 맞는 중·일의 국민감정 굴곡은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한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까지 대중국 친근감은 80%에 육박할 정도로 밀월기를 구가했다(표). 1989년 6·4 천안문 사건에 20%P 가까이 급전직하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 갈등을 거치면서 30% 가까이 더 내려갔다. 2012년 일본의 센카쿠 국유화와 이어진 중국의 보복에 호감도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상외교가 그나마 최악을 막았다. 2014년 11월 베이징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첫 단추였다. 회담장에는 국기도, 미소도 없었지만 해빙이 시작됐다. 2016년 항저우 G20에도 변화는 없었다. 2017년 함부르크 G20에 국기가 다시 등장했다.

2018년 5월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한·중·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7년 만에 도쿄를 방문했다. 직전에 미·중 무역 전쟁이 불붙었다. 시 주석이 지난해 오사카 G20에서 국빈 방문 초석을 깔았다.

중·일 데탕트의 촉매제는 미·중 무역 전쟁이다. 중국이 주도하고 일본은 따라갔다. 일본은 센카쿠 국유화를 풀지 않았다. 인근 해역의 군사 방어 태세도 풀지 않았다. 그런데도 중국은 경제 규모 세계 1·3위인 미·일이 손 잡고 중국을 봉쇄하는 시도를 차단해야 한다. 중·일 ‘유사 허니문’이 시작된 이유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5조 달러가 넘는 일본 GDP와 한국의 2조, 중국의 15조를 합치면 미국의 약 21조 달러보다 많다. 올 초 베이징에서 들은 한·중·일 FTA 추진의 속내다. 일본 전문가 린취안중(林泉忠) 도쿄대 박사는 홍콩 명보에 이를 “뜨거운 중국과 차가운 일본(中熱日冷)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미·중 신냉전, 홍콩보안법이 겹치며 2년여 이어졌던 애매한 중·일 ‘우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사 초치, G7 성명 주도한 일본

중국·일본·대만이 모두 자기 영토로 주장하는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를 일본 해 상자위대 소속 P-3C 초계기가 비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일본·대만이 모두 자기 영토로 주장하는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열도를 일본 해 상자위대 소속 P-3C 초계기가 비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새로운 중·일 충돌은 센카쿠와 홍콩이 무대다. 지난 6월 22일 오키나와 이시가키(石垣) 시의회가 센카쿠 열도의 도노시로(登野城)를 지명 혼동 방지를 이유로 도노시로 센카쿠(登野城尖閣)로 변경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오는 10월 1일 발효된다. 일본은 주소 변경이 중앙 정부 소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민감한 영토 주권과 관련된 문제를 아베 정부의 묵인 없이 진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무인도에 지명 혼동은 애초 성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중국 정부는 항의 성명을 내지 않았다. 관영 매체도 관련 소식을 보도하지 않아 애국심 발동을 막았다.

일본은 홍콩보안법도 공격했다. 중국 전국인대(국회)가 법 제정을 결의한 지난 5월 28일 일본은 쿵쉬안유(孔鉉佑) 중국 대사를 초치했다. 6월 17일 발표된 홍콩보안법 반대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성명도 일본이 주도했다. 자민당 내 반대 결의안도 나왔다. 미·중 신냉전에 일본은 자유·민주·기본인권·법치·시장경제 등 가치외교 기치를 들었다.

중국은 말 대신 물리적 압박에 나섰다. 중국 해경 순시함 2척이 지난 4일 새벽 센카쿠 인근 일본 영해에 진입했다. 일본 NHK에 따르면 5일 오후까지 37시간 동안 머물렀다. 2012년 센카쿠 국유화 이래 최장 기록이다. 일 해상보안청에 따르면 올들어 이달 5일까지 중국 해경선의 영해 진입은 16차례 52척, 접속수역은 단 열흘을 제외한 177일간 총 625척이 진입했다. 이시가키 의회의 조치가 중 해경선 ‘도발’에 대한 ‘반격’이란 해석이 나온다.

일본은 홍콩 다음 대만을 우려한다. 일단 양안이 통일되면 일본은 인민해방군 전함과 100여㎞ 공해에서 대치하게 된다. 일본이 홍콩보안법을 방관하지 않는 이유다.

중국은 왜 일본에 전후 배상금을 요구하지 않았나

한국전쟁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지 2년도 지나지 않은 1955년 3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최초의 대일 기본 정책을 채택한다.

첫째, 미군이 일본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주장함과 동시에 미국이 일본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데 반대한다. 둘째, 평등 호혜 원칙에 기반해 중·일 관계를 개선하고 단계적 외교관계 정상화를 실현한다. 셋째, 일본 국민을 우군으로 만들어 중·일 양국민 사이에 우정을 수립한다. 넷째,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해 미국을 고립시키고 일본 정부에 중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한다. 다섯째, 일본 국민의 반미(反美)와 일본의 독립·평화·민주를 추구하는 운동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지지한다.

1964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일본과 수교를 위해 일본팀을 구성했다. 국민당 원로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의 아들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에게 팀장을 맡겼다. 저우 총리는 대일 청구권 포기를 주장했다. 1965년 5월 방중한 우쓰노미아 도쿠마(宇都宮德馬) 자민당 의원에게 다음 사항을 전달했다. ▶중국은 타국의 배상으로 자국 경제를 건설하지 않는다. ▶전쟁 배상을 패전국에 부과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보듯 평화에 유해하다. ▶전쟁에 책임이 없는 세대에게 배상을 강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모리 카즈코(毛里和子) 와세다대 명예교수는 저서 『일중표류』(2017)에서 중국이 대일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이유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유엔이 패전국에 관용적 태도를 취했다. 둘째, 1952년 평화조약 교섭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대만 정권이 일본에 배상청구를 단념한 선례를 남겼다. 셋째, 배상을 포기하면 중·일 관계 정상화를 빨리 실현할 수 있어 일본과 대만의 국가 관계를 끊을 수 있다.

중국 외교가 덩샤오핑(鄧小平) 노선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 마오 시기 중·일 외교에 자꾸 눈이 간다.

신경진 중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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