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도 만난 강제징용 피해자 “정부 재단, 윤미향과 다를바 없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올해 91세인 이성우(사진) 할아버지는 70여년 전인 1944년 끌려가 일했던 일본의 가와사키 군수공장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글도 몰랐던 15살, “살아남아 고향 땅을 밟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외웠던 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출구 없는 강제징용, 시한폭탄된 한·일관계 中]

이 할아버지는 노무현 정부 때 마련된 강제동원특별법에 따라 ‘국외 강제동원 생환자’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3ㆍ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국민대표 33인’의 강제징용 피해자 대표로 참석해 이용수 할머니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지난 10일 경기도 수원 자택에서 만난 이 할아버지는 “일본과 협상을 해봐야 방법도 없고, 높은 사람들도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움만 한다”며 “우리 정부가 얼마 안 남은 생존자들을 위해서 대책을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8년 12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제징용 1000명 대규모 소송 기자회견'에서 일제 징용 생존자 이성우(당시 89세) 할아버지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2018년 12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제징용 1000명 대규모 소송 기자회견'에서 일제 징용 생존자 이성우(당시 89세) 할아버지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가장 시급한 게 무엇이라고 보시나.
산 사람은 왜 (보상을) 안 주냐, 이 말이야. 중국에도 강제동원 피해자가 있잖아요? 중국은 생존 피해자를 우대해준다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추장스러운 그런 존재로 생각할 거에요. (강제징용) 대표로 문 대통령을 작년에 만나긴 했지만, 어디 가서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걸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2018년 대법원 판결로 일본 기업 자산에 대한 현금화 절차가 이뤄지고 있다. 
재판에서 승소했는데도 일본이 안 주는 이유가 옛날에 이미 줬다는 거예요. 일본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당시 2억 달러는 유상 차관이고, 3억 달러가 피해자 몫으로 나온 건데, 우리는 ‘정부에서 이걸 썼으니 정부에서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다시 국회에서 만들어야지.
2018년 12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제징용 1000명 대규모 소송 기자회견'에서 일제징용 생존자 이성우(당시 89세) 씨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당시 소송단은 "정부가 사용한 한일청구권 자금을 반드시 피해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정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장을 접수했다. 또 일본기업을 상대로도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2018년 12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일제징용 1000명 대규모 소송 기자회견'에서 일제징용 생존자 이성우(당시 89세) 씨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당시 소송단은 "정부가 사용한 한일청구권 자금을 반드시 피해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며 정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장을 접수했다. 또 일본기업을 상대로도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이 할아버지를 비롯해 대법원 확정판결 원고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결국 생환자 보상 문제다. 과거 정부는 1974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했지만, 사망·행방불명자에게 최대 2000만원을 지급했을 뿐 생환자들에 대해서는 최대 80만원의 의료지원금만 지급했다. 생환자들에겐 ‘보상금’ 내지는 배상 성격의 지급금이 아예 없었다는 주장이다.)

국회에서 지난해 ‘문희상안’ 등 입법 시도도 있었다. 
거기에도 희망이 있었어요. 보편적으로 피해자에게 더 나눠줄 수 있는 걸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없단 말이에요. 되기만 하면 좋은데…. 결국엔 안 될 것 같아. 일본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면, ‘우리가 (보상에) 협조해도 너희 나라에는 야당하고 여당하고 뜻이 안 맞으니까 결국에는 안 되지 않냐’ 그렇게 트집을 잡으면서 협조를 안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인터뷰 말미에 강제징용 지원단체들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도 꺼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2014년 행안부 산하로 설립된 지원 재단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싫어할지 모르지만, 윤미향이 말이 나오는 것하고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나라에서 재단에 (사업비로) 20억원씩 나오잖아요. 우리한테는 지금 나라에서 1년에 80만원이 나와요. 한 달도 아니고 1년에. 어떨 땐 이런 사람들 밥그릇을 우리가 만들어주는 건가 생각이 들어요.
정부에 바라는 점은.
일본하고 협상해봐야 아무 방법이 없어. 높은 사람들끼리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움만 하고…. 다만 우리 같이 살아있는 증인들을 위해 과거에 없던 대책을 좀 만들어 달라, 이 이야기밖에 없어요. 생존자가 지금 몇백명 밖에 안 남았다고 그래요. 남은 분들도 90이 다 넘으셔서 몸도 안 좋아요. 정부가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을, 산 증인들을 위해 대책을 세워줬으면 좋겠다, 그게 소망입니다.

☞최근 위안부ㆍ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해 전 사회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한ㆍ일 간 현안으로 꼽히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모색해 보기 위해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일부나마 기록하고자 합니다.

인터뷰는 당사자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만, 피해자들은 고령이면서 법률ㆍ제도 전문가가 아니므로, 일부 용어상의 혼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에 응하고자 하시는 피해 당사자나 그 가족, 지원단체의 연락도 기다립니다.

수원=김다영 기자, 영상=왕준열ㆍ우상조
kim.dayoung1@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