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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된 자영업자…플랫폼노동자는 유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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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01면

10일 오후 1시, 서울 관악구 A택배 지역 물류센터에서 만난 3개월차 택배기사 한어진(22)씨는 “올해 초 제대 후 ‘하는 만큼 벌 수 있다’고 해서 시작한 일인데, 요즘 일이 너무 많아 몸이 배겨나질 못한다”며 “오늘 (대리점) 소장께 그만 두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 일을 시작한 3월만 해도 그는 하루 평균 100개 정도를 배송했다. 하지만 요즘은 하루 300개 정도를 나른다. 한씨는 “택배기사는 배송 물량이 늘면 수익도 늘어 나쁜 일만은 아니다”라며 “다만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최근 몸에 이상이 생겨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그만두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송 속도 경쟁에 쉴 틈 없는데 #유급휴가·고용보험 적용 못 해 #업체·기사 이해 갈려 법 제정 무산 #“시대에 맞게 법·제도 보완해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쇼핑이 급증하면서 택배와 같은 생활물류시장의 덩치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e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인 쿠팡의 하루 배송 물량은 200만~220만 개였지만, 올 3월 이후 평균 250만~300만 개로 급증했다. CJ대한통운도 올 들어 매달 30% 이상씩 성장하고 있다. 3월 2일엔 하루 택배 물량이 처음으로 900만 건을 넘기도 했다. 이 같은 호황 덕에 코로나19에도 취업자 수가 계속 증가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4월 운수·창고업 취업자 수는 3만4000명으로 지난해보다 2.4% 증가했다. 이와 달리 숙박·음식점, 교육서비스업의 4월 취업자 수는 전년보다 각각 9.2%, 6.9% 감소했다.

하지만 최근 택배기사, e커머스 배송기사 등 플랫폼 노동자의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e커머스 업체가 촉발한 유통 업계의 배송전쟁이 새벽·당일 등 갈수록 ‘속도전’으로 흐르면서 노동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택배는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에 포함돼 있지만 화물운수와는 구별되는 업종 특성상 법의 보호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택배기사는 과로로 사망하거나, 근무 중 폭행을 당해도 체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자영업자다. 특정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물량을 받아 배달하고 돈을 번다. 노동자가 아니다보니 노동자로서의 기본 권익을 누릴 수 없다. 노동계에선 이 때문에 “현행법 어디에도 정의하지 않은 유령 같은 사업자”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와 여당은 지난해 택배·배송 등 이른바 생활물류업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생활물류서비스발전법을 제정했다. 택배와 같은 생활물류서비스를 정식 산업으로 규정하고, 이들 산업 종사자의 처우 개선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해 당사자의 반발로 빛을 보지 못하고 폐기됐다. 정부가 추진 중인 택배기사의 고용보험 적용은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코로나19 이후에도 온라인 쇼핑 증가로 생활물류업은 계속 성장세를 보일 전망”이라며 “관련 사업 종사자 역시 계속 늘고 있는 만큼 노동법이 됐든, 생물법이 됐든 법적 근거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일·김나윤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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