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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한 자는 무죄, 상황극 만들어 유도한 자는 징역13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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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 상황극을 꾸며 애먼 여성을 성폭행하게 한 남성에게는 중형이, 실제 성폭행을 저지른 남성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대전지법, 강간 교사 등 혐의 기소된 #20대 남성 징역 13년, 성폭행자 무죄 #20대 남성, 여성 사는 빌라 주소와 #현관문 비밀번호 알려줘 성폭행 유도 #

 대전지법 형사 11부(김용찬 부장판사)는 4일 주거침입 강간 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A씨(29)에게 징역 13년과 성폭력예방교육 80시간 이수, 10년간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취업 제한을 명령했다. 주거침입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B씨(39)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대전지방법원 전경. [중앙포토]

대전지방법원 전경. [중앙포토]

 재판부는 "A씨가 피해자가 거주하는 빌라의 집 주소와 현관 비밀번호를 알아낸 다음 B씨에게 '강간상황극'을 알려주고 엽기적인 범행을 하게 한 다음 이를 지켜보는 대담성까지 보였다"며 " 피해 여성은 그 충격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A씨는 '강간 상황극' 피해자 이외에 다른 자동차 앞 유리에 적혀있는 여성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아내 수치심과 공포심·불안감을 느낄 만한 문자메시지 등을 보내는 등 죄질이 나쁘고 피해자도 처벌을 원한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이와 함께 재판부는 "증거를 종합해 보건데 B씨는 자신의 행위가 강간이라고 알았다거나, 아니면 알고도 용인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이씨에게 속은 나머지 강간범 역할로 성관계한다고 인식한 것으로 보여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A씨는 지난해 8월 랜덤 채팅 앱 프로필을 '35세 여성'으로 꾸민 뒤 '강간당하고 싶은데 만나서 상황극 할 남성을 찾는다'며 올린 글에 관심을 보인 B씨에게 집 주변 원룸 주소를 일러줘, B씨가 원룸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하게끔 만든 혐의로 기소됐다. 두 남성과 피해자까지 세 사람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A씨는 B씨가 피해자 집에 침입한 직후 원룸에 찾아가 범행 장면을 일부 훔쳐본 것으로 파악됐다. 사건 전 약 1주일 동안에는 아이디를 바꿔가며 피해자를 목표로 성폭행을 유도하는 글을 앱에 지속해서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이런 행동이 피해자 인격에 대한 고려와 존중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성 경시를 드러내는 방증이라고 했다.

 검찰 관계자는 "A씨는 익명의 탈 뒤에 숨어 인근에 혼자 사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며 "수법이 악랄하고 비인간적"이라고 했다. 죄의식 없이 장난처럼 여겼던 A씨에게 더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대전지방검찰청 청사. [중앙포토]

대전지방검찰청 청사. [중앙포토]

 A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 "(B씨를) 골탕 먹이려 했을 뿐 실제 성폭행 사건으로 이어질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채팅 앱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살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B씨 변호인은 "A씨에게 너무나 완벽히 속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며 "강간 상황극에 합의한 의사만 있었을 뿐 강간하려는 고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 사건과 별개로 A씨는 주거지 인근에 주차된 차량에서 다른 여성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다음 20여 차례에 걸쳐 음란 메시지를 보낸 혐의도 받았다. 검찰은 A씨(29)에게 징역 15년, 주거침입 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B씨(39)에게 징역 7년을 각각 구형했다.

대전=김방현·신진호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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