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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앤디자인

‘폭풍의 화가’ 변시지 돌아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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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팀장

이은주 문화팀장

“제주도는 바람으로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삶을 마감한 화가 변시지(1926~2013)입니다. ‘제주 작가’라면 많은 사람은 사진작가 김영갑(1957~2005)을 먼저 떠올리지만, 그에 앞서 ‘폭풍의 화가’라 불린 변시지가 있었습니다.

변시지가 1987년에 그린 ‘폭풍의 바다’를 볼까요. 온통 황톳빛인 하늘과 바다, 사람과 집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폭풍 속에 나뭇가지는 한쪽으로 심하게 휘어 있고, 파도는 거칠게 바위섬을 때리고 하얗게 부서집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듯 구부정하게 서 있는 한 사내와 조랑말 한 마리. 어딘가 위태해 보이고, 을씨년스럽고, 심지어 비장감마저 감도는 풍경입니다.

변시지, ‘폭풍의 바다’, 1987, 162x130㎝. [사진 누보]

변시지, ‘폭풍의 바다’, 1987, 162x130㎝. [사진 누보]

변시지는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나이 오십에 제주로 돌아올 때까지 타지 생활을 전전했습니다.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이주했고, 1945년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습니다. 1948년 당시 일본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광풍회 공모전에서 최연소의 나이로 최고상을 받고 도쿄에서 활동하던 그는 1957년 “조국의 미술 발전을 위해 강의를 맡아달라”는 서울대의 요청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한국 화단에 적응이 어려웠던 것일까요. 1년도 채 안 돼 서울대를 떠난 그는 여러 강단을 전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44년 만에 돌아온 제주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의 공간”(서종택, 『변시지:폭풍의 화가』)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매달려온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합니다. ‘나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새로운 화법을 얻기 위해 이전의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일본 시절의 인상파적 사실주의 화풍, 서울에서 비원을 즐겨 그리던 시절의 극사실적 필법을 모두 잊기로 한 것입니다.

누런 황톳빛에 수묵화 먹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그의 제주 풍경은 ‘이전의 자신’을 다 버리고서 얻은 것입니다. 이후 제주의 바람을 담기 시작하며 그의 작품은 1990년대에 접어들며 더욱 극적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그의 그림은 현실의 제주가 아닌 기억과 심상으로서의 제주를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88세에 삶을 마감한 변시지가 남긴 작품은 유화·수묵·조각·판화 등 1300여 점. 지난 5월 변시지의 전 생애 작품을 다룬 화집 『바람의 길, 변시지』(누보)가 출간됐습니다. 오는 4일부터 제주 돌문화공원 내 문화공간(누보)에선 그의 대작 3점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변시지를 이제 체계적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되는 걸까요. 빛과 바람이 일렁이는 제주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이은주 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