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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경이로운 초록 정원, 팬데믹 시대 치유가 된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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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김보희 작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김보희 작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금호미술관 김보희 초대전 전시장 전경. 맨 오른쪽 그림은 '더 테라스'. [사진 금호미술관]

금호미술관 김보희 초대전 전시장 전경. 맨 오른쪽 그림은 '더 테라스'. [사진 금호미술관]

위로가 필요했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모두 지치게 했다. 지금의 스트레스에 비하면 팬데믹 이전의 번잡하고 바쁜 일상이 주던 압박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온통 초록으로 채워진 그의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이 탄성을 지르게 된다.

한국화가 김보희 개인전 #금호미술관 'Towards' #캔버스에 한국화 채색

싱그러운 피톤치드가 그림에서 대량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해서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의 그림은 많은 이들에게 힐링이 되었겠지만, 지금 나무와 풀과 꽃으로 가득 채워진 그의 캔버스가 전하는 위로는 이보다 더 시의적절할 수 없다.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화가 김보희(68) 작가의 '투워즈(Towards)' 전시 얘기다. 1층에 전시된 대형 화폭의 그림 '더 테라스'에서부터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총 4개 층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일상의 정원과 낙원 사이  

김보희, Over the Trees - A Summer High Noon, 2019, Color on canvas, [사진 금호미술관]

김보희, Over the Trees - A Summer High Noon, 2019, Color on canvas, [사진 금호미술관]

김보희, Towards, 2013, Color on canvas, 112x81cm. [사진 금호미술관]

김보희, Towards, 2013, Color on canvas, 112x81cm. [사진 금호미술관]

"작가들은 결국 자기가 사는 환경을 작품에 그대로 드러낸다고 하잖아요. 이번에 전시하며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시장에 걸고 보니까 제 그림에 담긴 게 온통 제주 풍경이더라고요(웃음). 아침에 일어나 바라보는 마당부터 저녁에 우리집 레오(강아지) 데리고 산책하는 중문의 노을까지 다 제가 사는 주변의 풍경입니다."

전시장 벽을 가득 메운 초록 화폭 앞에서 단말 머리의 화가는 10대 소녀처럼 말갛게 웃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 공개한 작품은 총 55점.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빼곡히 그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작가가 자신의 정원에서 가까이 마주한 것들을 그린 그림(1층)부터 추상화에 가깝게 그린 바다 풍경 시리즈와 27개의 캔버스로 구성한 대규모 작품 '더 데이즈(The Days)(3층)도 있다. 그가 매일 산책하러 다니는 제주 중문의 거리를 그린 '중문(Jungmoon)' 시리즈(2층), 그리고 제주 풍경 위로 숫자가 겹쳐진 독특한 신작까지 망라했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만 해도 36점이다.

김 작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 삶의 새 터전이 된 제주 풍광이 영감의 원천"이라며 "2017년 학교(이화여대)를 정년퇴직한 후부터 남편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내가 날마다 받은 감동이 여기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그와 함께 나눈 얘기를 전한다.

자연스럽게 자연에 물들다 

김보희, In Between, 2019, Color on canvas, 400x400cm (2 pieces, 200x400cm each)[사진 금호미술관]

김보희, In Between, 2019, Color on canvas, 400x400cm (2 pieces, 200x400cm each)[사진 금호미술관]

화면이 온통 나무와 풀, 바다 등 자연 일색입니다. 
"아주 오래전엔 인물도 그렸는데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자연으로 채워졌습니다. 풍경을 그리되 현실 그대로를 그리기보다는 제가 '있고 싶은' 풍경을 그렸어요. 제가 구성한 낙원의 풍경인 셈이죠." 
그런데 그 풍경이 기묘할 정도로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이유가 뭘까요.  
"기법적으로는 또렷한 경계선보다는 부드러운 그라데이션(gradation·점점 옅어지게 표현하는 기법)을 쓰는 편이어서 그럴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평화롭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니까 자꾸만 그런 풍경을 그리게 되고요. 제 안에 그런 성향이 있어요. 어릴 땐 서로 숨고 잡히는 게 싫어서 술래잡기를 싫어했어요. 예전엔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도 잘 봤는데, 이젠 싸우고 잡아먹는 것을 보고 있기가 힘들더라고요. 포근하고, 평온하고 평화로운 게 좋아요."  
그림 속에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특이합니다.
"27개의 캔버스로 구성한 '더 데이즈'같은 대형 작품을 하면서 사람을 넣을까 말까 고민은 했어요. 어린아이를 그렸다가 지웠죠. 도마뱀, 개구리, 새, 거북이는 그려 넣었지만 결국 사람은 넣지 않기로 했어요. 대신 원숭이는 있어요(웃음).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시기 질투하고 싸우고 많은 문제를 만들고···(웃음). 제 그림에서만큼은 사람이 없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작가님 그림이 화제였죠. '투워즈(Towards, 가로 280x180cm)' 작품이 김정숙 여사 접견실에 걸려 주목받았습니다. 
"당시 청와대에서 대여해 갔는데 중요한 자리에 제 그림이 걸린 것은 작가로서는 기쁜 일이었죠. 그 그림은 그때까지 팔리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때 이후로 판매됐습니다. 어떤 분이 사 갔는지는 저도 모르지만요." 

누가 뭐래도 초록이 좋다 

김보희 'Being Together', 2019, 캔버스에 채색, 130x162cm. [사진 금호미술관]

김보희 'Being Together', 2019, 캔버스에 채색, 130x162cm. [사진 금호미술관]

27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더 데이즈'(The Days)' 작품 앞에 선 김보희 작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7개의 캔버스로 구성된 '더 데이즈'(The Days)' 작품 앞에 선 김보희 작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삶의 터전을 제주로 옮긴 이유는요. 
"제주는 바다도 좋지만, 사시사철 초록을 볼 수 있어서 제주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겨울에도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야자나무, 동백나무, 삼나무 등 초록이 보이죠.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섬이라는 것도 제게 맞는 거 같고요. 정년퇴임을 하면서는 제자들이 이런저런 신경 쓰지 못하게 숨어서 살고 싶었어요. 생각만큼 숨어지내지는 못해도, 조용히 살기에는 좋은 곳이죠." 
20대엔 양수리 풍경을 그리셨는데요. 젊었을 때 본 자연과 지금 보는 자연이 다른 게 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자연이 제게 경이로운 건 마찬가지예요. 열매 하나, 씨앗 한톨도 모두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죠. 잔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것들에 제가 자꾸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안에 더 큰 에너지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전시는 7월 12일까지.
김보희, Towards, 2016, Color on canvas, 91x72cm. 제주 풍경 위로 숫자가 겹쳐진 '투워즈(Towards)'는 기존 그림과는 사뭇 다르게 작가가 감지하는 시간과 풍경을 형상화한 신작이다. [사진 금호미술관]

김보희, Towards, 2016, Color on canvas, 91x72cm. 제주 풍경 위로 숫자가 겹쳐진 '투워즈(Towards)'는 기존 그림과는 사뭇 다르게 작가가 감지하는 시간과 풍경을 형상화한 신작이다. [사진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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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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