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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아버지 허영만이 서양화가 딸에게 늘 강조한 것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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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보리, 'Flower Portrait', 145x112cm, oil on canvas.[사진 헬리오아트]

허보리, 'Flower Portrait', 145x112cm, oil on canvas.[사진 헬리오아트]

서울의 '걷고 싶은 거리' 중 하나로 꼽히는 정동길에 아담한 사이즈의 갤러리가 하나 있다. 옛 신아일보 별관 1층에 자리한 헬리오 아트. 가로·세로 길이가 어른의 큰 걸음으로 너댓 발자국밖에 안될 정도로 작디작은 전시 공간이다.

허보리 개인전 '풀 불 물' #'꽃의 초상' 연작 선보여

혹시 가까운 시일에 정동길 걸을 일이 있다면 이곳에서 걸음을 잠시 멈췄다 가야 한다. 서양화가 허보리(39)작가의 개인전 '풀 불 물'을 볼 기회다. 무심하게 커다란 화폭을 가득 채운 꽃무더기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냥 예쁘기만 한 꽃들이 아니다. 꽃잎들은 거침없어 존재감을 드러내고, 일견 화려하지만 한편으로 매우 스산해 보인다. '꽃의 초상(Flower Portrait)' 연작들이다. 과슈로 작업한 대형 드로잉도 눈에 띈다. 화병에 흐드러진 꽂혀 있는 초록 풀들도 묘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7~10점. 모두 3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준비했으나 공간의 제약때문에 그때 그때 전시작을 바꾸며 선보이고 있다.

개념을 내세운 미술, 설치 작품 등이 대세인 요즘 누가 이렇게 호기롭게 꽃그림을 그릴까? 화면 한가득 꽃그림을 그린 작가가 궁금해졌다. 세는 나이로 올해 마흔, 두 초등생 자녀를 뒀다는 작가가 한뼘의 전시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꽃들의 시간, 사람의 시간  

서울 정동 헬리오 아트 갤러리에서 허보리 작가가 'Green Waltz'작품 앞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정동 헬리오 아트 갤러리에서 허보리 작가가 'Green Waltz'작품 앞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꽃들의 어떤 시간을 포착한 건가. 흐드러지게 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막 꽃잎이 지고 있는 것 같다. 
"둘 다 맞다. 하루는 꽃이 피어 있던 모습을 그렸다면, 이튿날 작업실에선 어제 그린 그림을 지워내고 다시 그 위에 그날 마주한 꽃의 모습을 기록했다. 한 화면에 꽃이 피어나던 시간과 시들어가는 시간이 함께 담긴 셈이다. 인간의 삶을 빠르게 돌려보기를 하듯이 꽃이 피고 지는 그 과정 자체를 한 화면에 담고 싶었다. " 
공들여 꽃을 그리고 그것을 다시 뭉그러뜨리며 지웠다는 건가.
"그렇다. 어제 애써 예쁘게 핀 꽃을 섬세하게 그려놓고 그것을 다시 지우는 일은 솔직히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포착하고자 한 것은 한순간의 또렷한 형상은 아니었다. 한때 활짝 피고, 어느 순간 희미해져 가며 변화하는 모습, 그 시간성을 담고 싶었다."
연작 제목이 '꽃의 초상'이다.
"몇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에 할머니 모습이 마른 풀 같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의 몸을 만지며 느낀 촉감이 화병의 시든 꽃을 버리기 위해 들어 올리던 촉감과 비슷했다. 꽃이 누리는 10여일의 시간이 수십 년에 걸친 인간의 생을 압축시킨 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허보리 '장미가족'. [사진 헬리오아트]

허보리 '장미가족'. [사진 헬리오아트]

허 작가는 "요즘 식물 드로잉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저는 꽃도 화병도 모두 '사람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한 작품 중엔 아예 가족 사진에 있는 모든 얼굴을 각각 꽃으로 표현한 그림( '장미 가족')도 있다. 여러 세대가 함께한 가족 사진엔 사실상의 인생의 각 여정이 한 공간에 있다는 생각을 담은 작품이다.

허보리는 서울대와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줄기차게 그림만 그려온 것은 아니다. 5년 전까지는 패브릭을 소재로 한 설치작품으로 '무기' '고기' 연작 등을 선보였다. 양복과 넥타이로 만든 '무기' 설치작업은 사회적 가면으로 무장한 사회 현실의 치열함을 전쟁터에 비유한 작업이었고, '고기' 연작은 바느질과 전통자수 방식으로 고기의 마블링을 수놓은 작업이었다.

'그리기'의 희열

허보리, Flower Portrait II ,종이에 과슈, 흑연) 132x142cm , 2018. [사진 헬리오아트]

허보리, Flower Portrait II ,종이에 과슈, 흑연) 132x142cm , 2018. [사진 헬리오아트]

허보리, Flower Portrait I, 종이에 과슈, 흑연),132x135cm , 2018.[사진 헬리오아트]

허보리, Flower Portrait I, 종이에 과슈, 흑연),132x135cm , 2018.[사진 헬리오아트]

회화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기와 고기 연작 모두 노동과 생존투쟁 등 우리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삶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는가. 설치 작업을 하며 머릿속엔 늘 바니타스(Vanitas·16~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한 정물화. 흔히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시계, 촛불, 꽃 모래시계 등이 등장한다) 회화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여기서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해왔다."  
'꽃그림'을 그린다는 부담 같은 것은 없었나. 
"꽃은 이미 수많은 작가가 그려온 소재다. 10년 전만 해도 내가 지금 이런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리기' 작업이 몹시 그리워졌다. 어릴 때 그림 그리며 느꼈던 희열을 내가 한동안 잊고 살았구나 싶더라. 전에는 하얀 화면이 두려웠던 적도 있는데 다시 붓을 잡고 나니 내 에너지가 고스란히 그림에 담기는 것 같아서 좋았다. 이제야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게 된 것 같다" 

"재미없으면 하지마!"

아버지가 허영만 만화가라고. 전시 보고 뭐라고 하셨나. 
"예전부터 내 작품에 대해선 그다지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내가 무기 연작에 매달려 바느질 작업을 할 때도 '여기가 개성공단이냐?'고 말씀하신 게 전부였다(웃음). 하지만 어릴 때부터 평소에 잘 물으시는 질문은 있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그리고 보여주면 '재미있었니?'고 물으시는 거다. '네가 재미있어야 보는 사람도 재미있다'고 항상 강조하셨는데, 이번에 그림 그리면서도 그 말씀이 정말 많이 떠올랐다." 
앞으로의 계획은.  
"당분간 식물 그림에 천착해볼 생각이다. 현재 제 작품이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추상작업을 해보고 싶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느끼는 것. 내가 해석한 것을 좀더 자유롭게 표현해보고 싶다. " 전시는 6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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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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