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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정경숙 40년…기로에 선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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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도쿄 도심에서 전철로 1시간,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지가사키(茅ヶ崎)시 시오미다이(汐見台) 5-2.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을 비롯한 숱한 문학 작품과 만화 '슬램덩크'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쇼난(湘南)해변과 맞닿은 곳에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의 아치형 정문이 있다.

자민당식 세습과 관료정치 대신 #자수성가형 정치리더 육성 역점 #민주당정권 실패 이후 내리막길 #보수색채 출세지상주의가 발목 #정경숙출신 정치인 물의 잇따라

마쓰시타전기산업(현 파나소닉) 창업자인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가 84세이던 1979년 사재 70억엔을 투입해 설립한 인재사관학교다.

마쓰시타정경숙이 처음 문을 연 1980년의 모습.'개숙'40년을 맞은 마쓰시타정경숙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인 양성기관으로 민주당 정권 시절 정경숙 출신 총리(노다 요시히코)를 배출하는 등 주가를 높였지만, 민주당 정권의 실패와 함께 위상이 하락했다. 지나친 보수 성향과 출세지향주의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지지통신 제공]

마쓰시타정경숙이 처음 문을 연 1980년의 모습.'개숙'40년을 맞은 마쓰시타정경숙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인 양성기관으로 민주당 정권 시절 정경숙 출신 총리(노다 요시히코)를 배출하는 등 주가를 높였지만, 민주당 정권의 실패와 함께 위상이 하락했다. 지나친 보수 성향과 출세지향주의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지지통신 제공]

일본의 고도성장기였지만, 마쓰시타는 "급속한 부흥으로 세계를 리드하는 듯 보이지만 아직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미래를 열 장기적 전망이 없다"(설립취지문)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진실로 국가를 사랑하고, 21세기 일본을 제대로 만들어갈 지도자를 키우겠다"며 이곳을 열었다.

에도 말기의 선각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메이지유신 주역들을 길러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비견되는 실험이었다. 907명의 지원자 중 선발된 1기생 23명으로 1980년 4월 1일 정경숙은 출범했다. 그리고 지난 1일로 꼭 40년이 됐다.

마쓰시타는 94세로 세상을 뜬 1989년까지 이 정경숙을 직접 챙겼다. 그의 인재 양성 방식은 독특하다. "지도자는 스스로 길을 찾고 개척해야 한다"(자수자득·自修自得)', "본질은 현장에 있다"(현장주의), "통찰력과 체력, 인간성을 겸비해야 한다"(덕지체·德知體 삼위일체)가 큰 틀이다. 상근 강사가 없고 연구 과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성, 4년 내내 이어지는 기숙사 생활과 오전 6시 기상 직후의 청소·구보 등 자기 관리가 강조된다.

마쓰시타정경숙을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자의 1981년 모습. [지지통신 제공]

마쓰시타정경숙을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자의 1981년 모습. [지지통신 제공]

정경숙 내부는 지금도 설립자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 동상과 대강당의 대형 사진 외에 '크게 참아야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대인(大忍)', 젊은 시절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청춘(靑春)' 등의 친필 휘호가 곳곳에 붙어있다.

애초부터 방점은 국가 경영을 위한 정치인 양성에 찍혔다. "자민당과는 다른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드는 게 마쓰시타의 궁극적 목표였다"(산케이 신문)고 하니 정경숙은 신당 창당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보수신당의 꿈은 무산됐지만, 정경숙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사관학교로 성장했다. 세습 정치인과 관료 출신이 자민당의 주류였다면 정경숙의 중심은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지방(地盤·지역구)', '간방(看盤·지명도)', '가방(선거자금)' 등 ‘3방’을 갖지 못한 이들이 맨주먹 하나만 믿고 몰려들었다. 졸업생 285명 중 정치 분야 진출자가 40%인 113명, 현역 국회의원도 중·참의원을 합쳐 33명이다.

마쓰시타정경숙이 처음 문을 연 1980년의 모습. [지지통신 제공]

마쓰시타정경숙이 처음 문을 연 1980년의 모습. [지지통신 제공]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정경숙 출신 15명이 무더기로 당선된 뒤 주가가 최고조에 달한 건 '3년 천하'로 끝난 민주당 정권(2009년 9월~2012년 12월) 때였다. 하토야마(鳩山) 내각에선 졸업생 8명이 각료직을 싹쓸이했다. 이어 '마쓰시타 1기생'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가 재무상을 거쳐 총리에 등극했다.

2011년 12월 일본 교토에서 만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만찬 시작 전에 환담하고 있다. 노다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경직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한일관계 악화의 빌미가 됐다.[중앙포토]

2011년 12월 일본 교토에서 만난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만찬 시작 전에 환담하고 있다. 노다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경직된 태도를 보였고, 이는 한일관계 악화의 빌미가 됐다.[중앙포토]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다. '악몽'에 비견되는 민주당 정권의 실패는 정경숙의 이미지까지 깎아내렸다. 후보자 공모가 늘어나며 '마쓰시타 인맥'의 파워도 약화됐다. 정당과 정치인들의 '정치학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것도 악재였다.

민주당 정권이 붕괴된 2012년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마루야마 호다카(丸山穗高·36세·2012년 졸업)가 당선된 뒤 정경숙 출신으로 새롭게 배지를 단 그의 후배는 없다. 20명을 넘나들던 숙생들의 수는 줄었고, 2019년엔 불과 2명만 뽑혔다.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인 가와이 가쓰유키(河井克行) 전 법상(법무대신). 선거자금 문제로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인 가와이 가쓰유키(河井克行) 전 법상(법무대신). 선거자금 문제로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정경숙이 활력을 잃은 데 대해 다른 각도의 분석도 있다. 일본 정치에 밝은 유력 언론사 간부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풍토, 출세 지향적 분위기가 창의성과 감수성, 역할 공간을 스스로 줄인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경숙 출신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극단적인 보수 색채의 인물이 많다. 민주당 정권의 마지막 총리 노다 요시히코는 위안부 문제에서의 비타협적 태도, 센카쿠 열도 국유화 등으로 한국·중국과 크게 대립했다. 그래서 "미국이 우려할 정도의 보수적 국가운영으로 (자민당에서도 가장 우파인) 아베 신조의 정권 탈환에 기여했다"(미야기 다이조 『현대일본외교사』)는 혹독한 평가도 있다.

지난해 독도와 북방영토 관련 망언으로 논란을 불렀던 마루야마 호다카 일본 중의원 의원.[마루야마 의원 트위터 캡쳐]

지난해 독도와 북방영토 관련 망언으로 논란을 불렀던 마루야마 호다카 일본 중의원 의원.[마루야마 의원 트위터 캡쳐]

막내 격인 마루야마 호다카는 지난해 "독도와 북방영토를 전쟁으로 되찾자"는 망언으로 일본 사회를 흔들었다. 지난해 9월 아베 내각의 법상(법무대신)으로 입각했다가 정치자금 스캔들로 사퇴한 뒤 검찰수사를 받으며 정치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가와이 가쓰유키(河井克行)도 정경숙 출신이다.

최근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문제아가 모두 정경숙 졸업생인 셈이다. 이밖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총무상 역시 이곳 출신이다.

마쓰시타정경숙의 상징물인 여명의 탑을 비롯한 내부의 모습. [중앙포토]

마쓰시타정경숙의 상징물인 여명의 탑을 비롯한 내부의 모습. [중앙포토]

정치사관학교로서의 위상이 하락하며 정경숙도 변화를 시도 중이다. 지난 2018년 선발된 39기생들 중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 국적의 정치 지망생이 포함됐다. 마이니치 신문에 따르면 2020년부터는 4년제 외에 2년제 속성 과정을 개설했고, 사회적 수요 변화에 따라 연수 프로그램도 조정했다. 경직성과 폐쇄성을 극복하려는 정경숙의 노력은 어떤 결실을 볼 것인가.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꿈이 40년 만에 기로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