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아버지 박수근, 사랑꾼이었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83호 21면

내 아버지 박수근

내 아버지 박수근

내 아버지 박수근
박인숙 지음
삼인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의문이 좀 풀렸다. 왜 그의 그림에는 그토록 많은 여인이 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기 업은 단말 머리 소녀부터 맷돌질하는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빨래하는 여인들,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들…. 1930년대부터 줄기차게 자신의 화폭에 ‘일하는 여인들’을 각인해 놓은 건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넘어 여성에 대한 경외감의 표현이었다.

한국 근현대화단의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의 맏딸인 저자가 그의 아버지가 1965년 51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했던 시간을 돌이키며 쓴 글이다. 1944년생인 저자는 미술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해 현재 시니어 모델로 인생 2막을 즐기고 있다.

1965년 작고하기 두 달 전의 박수근. 서울 전농동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삼인]

1965년 작고하기 두 달 전의 박수근. 서울 전농동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삼인]

박수근은 강원도 양구 부농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유복했으나 부친의 광산사업이 실패하면서 가계가 기운 이후 평생 쪼들리며 살았다. 열 두살 때 밀레의 ‘만종’ 그림을 보고 “마치 홀린 사람처럼 밤낮으로 밀레 같은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달라 기도했다”는 박수근은 화구를 품에 끼고 양구의 산과 들, 마을과 시내를 쏘다니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마을을 보듬던 커다란 나무들, 옹기종기 모인 초가지붕들, 정겨운 이웃들”은 그때 가슴에 새겨진 풍경이었다.

그림에 이토록 빠져 지낸 아버지라면 가족은 자칫 그에게 관심 밖이 됐을 만도 한데, 딸이 회상하는 아버지 박수근은 한마디로 ‘사랑꾼’ 그 자체다. 이웃 부잣집 딸이었던 김복순과 극적으로 결혼했고, 부부 사이에 애정 표현도 남달랐다. 틈이 나면 아내와 가족을 모델로 그렸다. “가부장제가 당연시되던 시기에 아버지 같은 남자는 찾아보기도 힘들었다. 아버지는 정말 시대를 역행하는 로맨티스트”였다.

그 사랑 때문이었을까. 가난과 전쟁의 그 난리통을 겪은 시대인데도 저자가 회상하는 "그림을 그릴 때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정물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 늘 단순하고 평범한 것만 그리던 아버지, 그래서 "동네의 산과 개울, 소박한 나무와 이웃이 죄다 모여 있었던 화폭이 널려진 마루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축소판”이었다.

하지만 박수근은 생전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했던 그 어떤 사람도, 나조차도 박수근이 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수근이 딸에게 남긴 것은 그 ‘따스한 온도’의 기억이다. 일상의 평범함에서 "진실함과 선함을 찾고, 그것을 그리는 일에서 행복감을 느낀” 아버지, 그 그림의 온도. 살아서 부와 명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화가 박수근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누구보다 충분히 사랑했기에 ‘영원한 화가’로 남은 것이 아닐까. 한 권의 회고록이 이토록 재미있을 줄이야.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잔잔한 감동이 긴 여운으로 남는 영화 한 편을 본 듯하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