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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래 살면 다 좋을까, 배웅해줄 친구 없는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58)

학교에 다닐 때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사는 곳도 가까워 우리는 늘 몇몇 친구와 같이 몰려다녔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는 각각 서로가 택한 길을 가야만 했다. 친구의 직장은 지방에 있어 좀처럼 만나기가 어려웠다. 학창시절에는 친구와의 관계가 모든 걸 지배했지만 사회생활을 하며 다른 일에 종사하다 보니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다. 만남이 뜸해지면서 우정도 점점 엷어지는 듯했다. 어쩌다 만나도 다소 분위기가 낯설고 대화가 겉돌 때도 있었다.

우리의 우정이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른 것은 한참 세월이 흘러서였다. 그때는 모두 회사의 중견 관리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동호인들과 함께 주최한 음악회에 그를 초대했다. 공연이 끝나고 오랜만에 차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연 소감에 이어 화제가 건강에 이르자 그가 허리가 아파 정형외과에 다닌다고 했다. 마침 나도 허리가 좋지 않았던 터라 우리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서로 전했다. 잠시 후 병이 나으면 음악을 다시 하자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얼마 후 그에게 전화가 왔는데 병세가 좋지 않아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알아보니 말기 암이었다. 허리가 아팠던 것은 암이 뼈까지 전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정기적으로 병문안을 갔다. 병실에 가면 이젠 의학의 발달로 암도 나을 수 있다며 그를 격려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하였다. 처음에 갔을 땐 침상에 걸터앉아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중에는 혼자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말기 암이었던 친구를 보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연상의 어른이 사망할 때는 슬퍼도 당연시 받아들였는데 친구의 죽음은 오히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진 pixabay]

말기 암이었던 친구를 보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연상의 어른이 사망할 때는 슬퍼도 당연시 받아들였는데 친구의 죽음은 오히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진 pixabay]

하루는 병실에 들어가자 그의 아내가 자리를 비켜주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본즉슨 이러했다. 아내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초빙해서 기도를 부탁했다. 그러나 친구는 그때까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목사가 신도 여럿을 동반해서 기도를 마치고 친구에게 큰 소리로 "믿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그는 답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목사가 돌아간 후 아내는 그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목사님을 어렵게 초빙했는데 왜 말씀에 답을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녀 입장에선 남편이 야속하게 생각되었다. 친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갑자기 응할 수 있냐며 화를 내었다. 그의 말로는 거짓으로 그렇다고 할 순 없었다고 한다.

여러 명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선 요란한 기도와 찬송가를 부르기보다 조용히 환자를 위해 묵상하고 따뜻한 말을 전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병실에 있는 환자들이 모두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을뿐더러 개중에는 고통을 이겨내느라고 힘든 사람도 있을 거고 밤새 이루지 못한 잠을 청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 나오는 파도와 바다의 일화를 나누었다. 파도는 자신이 바다인 줄 모르고 바위에 부딪히면 그가 소멸하는 걸 걱정하다가 실상은 자신이 바다였던 걸 뒤늦게 알게 된다는 줄거리다. 비유하면 우리의 삶과 죽음도 그와 같다는 얘기다. 친구는 그럴까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그때가 그랬다. 간호사는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고 한다.

친구는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나중에는 신경을 차단하는 시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어떠한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얼마 후 운명했다. 친구를 보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연상의 어른이 사망할 때는 슬퍼도 당연시 받아들였는데 친구의 죽음은 오히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월이 지나며 상처는 차츰 잦아들었다.

지난달에는 친구 하나가 전화를 해서 심장이 좋지 않아 입원하는데 혹시 수술 도중 죽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요즘 의술이 발달하여 그렇지 않을 거라며 위로는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실제로 그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니 덜컥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친구가 자기보다 오래 살기를 바란다.

젊었을 적 친구들이 군 복무를 시작할 때다. 제일 먼저 입대한 친구는 여러 사람의 배웅 속에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가 적어졌다. 마지막에 입대한 사람은 배웅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을 것 같다. 아마 죽음도 그러하지 않을까. 그러니 오래 산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과유불급이란 말도 있지만 항상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삶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의 삶을 지탱하기 위하여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 생물들은 단지 나를 위하여 죽어갔던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도록 죽어야 한다. 한 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다. 인간 역시 자연 생태계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으며 서로가 아끼고 사랑해야 함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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