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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레이건, 치매와의 싸움

중앙일보

입력

1993년 말께 가족들이 전부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는 아버지가 50년대에 찍은 영화 ´전쟁포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수년 동안 내게 미군포로들이 받은 끔찍한 고문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때 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 듯 했다. 배우가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다.

마침내 아버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얘야, 난 그 영화에 출연한 기억이 없구나." 그로부터 6개월 뒤 아버지는 의사에게 호텔 같은 곳에 가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불평했다. 1994년 가을 아버지는 메이요 클리닉에서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

한 여인이 슈퍼마켓에 차를 몰고 가서는 차문을 어떻게 여는지 몰라 30분간 차 안에 앉아 있는 예도 있다. 한 기술자는 넥타이 매는 법을 잊어버려 직장에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경우도 그들과 흡사하다. 우선 매우 친숙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그 다음 수개월간은 별 다른 증상 없이 지내다가, 결국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초기 경고 신호를 감지하는 것이 우리 책임이다. 사람들은 40대가 되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 등의 병을 사전에 알아내려고 갖가지 검진을 받기 시작한다. 알츠하이머병도 우리를 죽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결혼기념일을 잊는 정도의 병이 아니다.

뇌는 신체에 일어서기·걷기·삼키기·숨쉬기 등 온갖 일들을 하도록 명령한다. 이런 체계가 무너지면 죽는 것이다. 따라서 간단한 인지력 검사를 실시해 정밀검사를 요하는 변화상을 의사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가족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의사가 개입할 수 있다. 아버지가 진단을 받았을 때는 찾아볼 수 없었던 치료법들이 지금은 나와 있다. 물론 그것으로 병을 고칠 수는 없지만 시간을 벌 수는 있다.

사람들이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을 때 나는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가 우리를 너무나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다. 다만 운동기능이 퇴행했을 뿐이다. 아버지 곁에는 늘 자상하신 어머니와 훌륭한 간호사 다이앤이 있다. 그들은 완벽한 콤비로서 아버지가 가능한 한 새로운 자극과 재미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내도록 애쓴다.

가끔씩 아버지를 찾아보면서 우리는 아버지가 밝은 빨강색으로 칠한 내 손톱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나 다이앤은 손톱에 화려한 색을 칠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늘 "모린, 네가 거기에 앉아"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 손톱을 들여다 보고는 환하게 웃는다.

병세가 심해지기 전 우리는 퍼즐 맞추기를 했다. 처음엔 3백 조각짜리 퍼즐을 했지만 나중엔 1백 조각짜리로 내려갔다. 불행히도 이제 아버지는 퍼즐을 맞출 수 없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의 영웅이었지만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을 때만큼 위대해 보인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알츠하이머병에 대해 터놓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2층 커튼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이웃이든, 명절에 더 이상 찾아오지 못하는 친척이든, 전직 대통령이든 알츠하이머병은 날마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에 아무런 희망 없이 맞서는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이 돼야 한다.

알츠하이머병 협회는 의지할 데 없는 환자 가족들이 시작한 단체다. 협회의 각 지부는 계속 정보를 수집해 상조회원들과 그 정보를 공동으로 활용한다. 그들은 스스로 낙담하며 두손 놓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서로 나누며 도움을 준다. 우리는 지역 경찰에 등록된 ´안전 귀가´ 팔찌를 권장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협회의 공공정책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는 늘 의회의 관심을 촉구한다.

우리 가족은 이번에 연구기금 증액을 요구할 계획이다. 또 매년 가을이면 협회의 각 지부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기억을 위한 걷기운동´을 후원한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일반인들의 많은 관심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글 : 모린 레이건 로널드 레이건 前 미국 대통령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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