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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사우디 간신히 달랬더니···이젠 美석유사가 트럼프 치받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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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해 2월 11일 촬영된 미국 텍사스 원유 생산 설비.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2월 11일 촬영된 미국 텍사스 원유 생산 설비. [로이터=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사우디아라비아ㆍ러시아가 촉발한 유가전쟁이 미국 내 석유 내전(內戰)으로 흘러가고 있다. 150여 년 전 노예제도를 쟁점으로 미국이 남부와 북부로 갈라졌다면 이번 내전의 화두는 석유 패권이다. 미국 경제의 핵심축인 석유산업을 두고 ‘전통 강자’ 거대 석유회사와 ‘겁 없는 도전자’ 셰일업계가 맞붙었다.

미국 대형 석유사, 트럼프 주도 감산에 ‘반기’

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배럴당 26.78달러에 거래됐다. 장중 배럴당 29.0달러까지 치솟았던 국제유가가 30달러 문턱을 바로 앞에 두고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3일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대형 석유회사 최고경영자(CEO)와의 간담회가 문제였다.

지난 2일 트럼프 대통령은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해 “1000만~1500만 배럴 감산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석유ㆍ가스산업에 굉장한 일이 될 것”이라며 트위터를 날린 이날부터 유가는 치솟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날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과 대형 석유사 CEO 간담회에서 석유 감산과 관련한 논의가 있을 것이란 예상이 시장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ㆍ러시아는 물론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사이에서도 미국이 먼저 석유 생산량 감축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상황이었다.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미국 석유 등 에너지 부문 최고경영자(CEO)와 간담회를 가졌다. [AF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미국 석유 등 에너지 부문 최고경영자(CEO)와 간담회를 가졌다. [AFP=연합뉴스]

미국 방송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엑손모빌ㆍ셰브런 등 대형 석유사 CEO와 백악관에서 만났지만 석유 감산은 논의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들 석유사 CEO는 다른 회사와 똑같이 석유업계에도 코로나 피해 지원 대책이 적용돼야 한다는 자신들의 요구 사항만 전달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미국 석유협회(API) 마이크 소머스 대표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감산 논의와 관련한 질문에 “우리는 시장 경제 논리에 맞춰 운영될 뿐”이라며 “정부 소유 회사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미국 내 석유 메이저 회사가 감산 동참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가 상승에 제동이 걸렸다. ‘떠오르는 신예’ 셰일업계에 대한 미국 내 전통 석유사의 견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진짜 적은 내부에’ 셰일업계 고사 작전

미국 내 셰일산업은 최근 몇 년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달 미국 내 셰일석유ㆍ가스 생산량은 일일 969만 배럴을 기록했다. 2017년 3월 558만 배럴이었던 셰일석유ㆍ가스 생산량이 불과 3년 사이 73.7% 급증했다. 미국이 2018년을 기점으로 사우디아라비아ㆍ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석유 생산량 1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건 셰일산업 덕이 컸다. 이번 유가전쟁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ㆍ러시아가 맞붙었지만 미국 셰일산업이란 ‘공공의 적’을 치기 위한 전략도 숨어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유가전쟁을 치르며 증산 경쟁에 나섰고 유가는 20달러대로 내려앉았다. 연구기관마다 차이가 있지만 셰일산업의 손익 분기점은 배럴당 30~50달러 정도다. 20달러대 유가가 유지되면 셰일업계는 연쇄 도산할 수밖에 없다. 지난 1일 셰일업체인 화이팅 페트롤리엄이 경영 악화로 파산 신청을 하며 그 시작을 알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랴부랴 무함마드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며 유가전쟁 종식을 위해 중재에 나선 까닭이다.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 알카이르 항구 너머로 유조선 한 대가 보인다. [AF=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 알카이르 항구 너머로 유조선 한 대가 보인다. [AF=연합뉴스]

‘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격언은 석유시장에도 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돌아온 차르’ 푸틴 대통령과 ‘중동의 실권자’ 빈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협상 무대로 다시 끌어앉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미국 내 거대 석유회사를 움직이진 못했다.

미국 내 원유 생산량이 급증하는데 셰일업계가 크게 기여한 건 사실이지만, 미국 내 기존 거대 석유사는 사우디ㆍ이라크 등 중동 지역에서 생산하는 석유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194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치러진 중동 전쟁은 ‘일곱 자매(Seven Sisters)’란 별명으로 유명한 이들 소수 거대 석유사가 중동 지역에 생산 기반을 확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70여 년 넘게 공고히 유지됐던 석유 카르텔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났다. 채굴 기술의 발달에 따른 셰일산업의 폭발적 성장이다. ‘셰일 혁명’은 기존 대형 석유사가 아닌 셰일 채굴 기술로 무장한 중소 신생업체가 주도했다.

그동안 사우디ㆍ러시아 간 갈등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형 석유사의 ‘감산 비토’를 계기로 숨어있던 그들의 의도가 드러났다. 말 그대로 고사 작전이다. 셰일업계의 빠른 성장이 미국 전통 석유산업 ‘카르텔’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물론 이들이 원하는 건 셰일산업의 완전한 패망이 아니다. 저유가로 중소 셰일업계를 고사시키고 이들을 자사에 인수ㆍ합병하려는 계산이다.

대형사 유가 10달러 장기전 대비, 셰일업계 로비전 반격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사우디ㆍ러시아를 설득해 석유 감산에 나서는 등 ‘셰일산업 구하기’에 나섰지만 미국 내 석유업계의 내부 분열이란 벽에 부딪혔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전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 간 유가전쟁 휴전도 물 건너간다. 두 나라는 미국이 먼저 움직여야 자신들도 감산하겠다며 버티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미국 대형 석유사는 이미 장기전에 돌입할 태세다.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비축하고, 긴축 경영에 들어가는 등 배럴당 10달러대 진입에 대비 중이다.

물론 고사 직전에 몰린 셰일업계의 반격도 만만찮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아라비아ㆍ러시아 등에 새로운 제재를 적용하도록 셰일업계가 백악관을 겨냥해 강도 높은 로비전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저유가가 장기화하면 셰일산업은 물론 전통 석유업계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지난 2일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자금 흐름이 나빠졌다며 엑손모빌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1’로 강등했다. 150여 년 전 ‘남북 전쟁’ 때처럼 미 경제에 치명적 내상을 남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미국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엑손모빌 간판.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엑손모빌 간판. [로이터=연합뉴스]

세븐 시스터스(일곱 자매·Seven Sisters)
1948년부터 73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대 이란 등 다른 중동 국가 간 전쟁이 벌어진다. 중동전쟁이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중 그리고 전쟁 이후에 미국ㆍ유럽의 소수 대형 석유사가 이란을 비롯한 중동 패전국의 원유 채굴권을 독점적으로 확보한다. 이때 컨소시엄으로 참여한 엑손과 모빌·셰브런·걸프오일·텍사코·BP·로열더치셸 7개 회사가 ‘세븐 시스터스’라고 불렸다. 미국과 유럽의 석유 생산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던 이들 기업이 중동까지 ‘접수’하면서 세계 석유 패권을 이후 수십 년간 주무르게 됐다. 현재 이들 회사는 인수·합병을 통해 엑손모빌·셰브런·BP·로열더치셸 4개가 됐다.

2000년대 들어 신흥시장이 부상하면서 이들을 위협하는 ‘뉴 세븐 시스터스’도 등장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 러시아의 가스프롬, 중국의 시노펙, 이란의 국영 석유사(NIOC), 베네수엘라의 PDVSA, 브라질의 페트로브라스,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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