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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추락한 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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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낯선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느꼈다.’

배우 김선아가 출연한 한 남성 화장품 CF의 유명한 카피다. 지하도를 걸어가던 한 여성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여성에게서 느낀 그의 향기에 잠시 멈춰 서고, 그 순간 이 카피가 화면 위로 흐른다. 사실 이 CF는 1995년 리밍(黎明)과 진청우(金城武)가 주연을 맡은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의 영화 ‘타락천사(墮落天使)’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폴른엔젤스(fallen angels·추락한 천사)’는 금융시장 용어로도 쓰인다.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인기가 식은 주식이나, 신용도가 높은 우량 기업으로 ‘투자적격 등급’으로 발행됐지만 발행기업의 신용하락으로 ‘투기등급’으로 강등된 채권을 일컫는다. 3대 국제신용평가사 중 2곳 이상이 투기등급으로 떨어뜨린 경우에 해당된다.

2005년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의 신용등급이 정크 본드(투자부적격 채권)로 강등되자 미 언론이 이들 기업의 회사채를 ‘추락한 천사’라고 지칭하며 널리 쓰이게 됐다. 최근에는 성장성은 있지만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이 발행한 채권이나 인수합병(M&A) 자금 조달용 발행 등도 포함된다.

세계 금융시장이 ‘추락 천사발’ 신용 위기 위험에 떨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기업 실적과 재무구조 악화 등으로 항공·숙박 업계가 얼어붙고 유가 하락의 직격탄을 맞은 에너지 업계의 회사채가 자유 낙하 중이라서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기업이 높은 금리를 제공해도 투자자의 외면을 받게 되고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해외 주요 투자은행은 올해 미국 회사채 시장에서 2000억 달러(약 247조원) 이상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한국도 회사채 시장의 신용경색 우려에 긴장하고 있다. 주요국 증시 폭락 속 자금 사정이 나빠진 증권사가 회사채와 기업어음(CP) 등을 팔아 자금 조달에 나섰지만 수요 부족으로 시장은 얼어붙었다. 한국은행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증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에 회사채와 CP를 담보로 직접 대출을 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나선 이유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지만, 중앙은행이 추락 천사의 날개를 지켜낼 방패막이가 될 수 있을까.

하현옥 복지행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