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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의 밀담]中도 美앞마당에 교묘히 투입…적국조차 못건드는 '하얀 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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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항에 7만t급 선박이 예인선에 끌려 도착했다. 전체를 하얗게 칠한 배는 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 해군 소속의 병원선 컴포트함(T-AH-20)이다. 앞서 지난달 27일 LA항엔 컴포트함의 자매선인 머시함(T-AH-19)이 도착했다.

고대 아테네 최초의 병원선 등장 #1차대전 당시 영국 77척 운용해 #평시에는 재난 대응 임무도 맡아 #중국도 뛰어든 병원선 외교 치열

미국 해군의 병원선 머시함(T-AH-19)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LA항에 입항하고 있다. [미 해군 유튜브 캡처]

미국 해군의 병원선 머시함(T-AH-19)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LA항에 입항하고 있다. [미 해군 유튜브 캡처]

이들 병원선은 민간 병원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반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을 맡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의료시스템 붕괴를 막는 게 이들 병원선의 임무다.

머시급 병원선인 머시함과 컴포트함을 겉에서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길이는 272m에 높이는 30m다. 갑판의 넓이는 축구장 4개 정도다. 최고 속력은 17.5노트(약 시속 32㎞)다.

두 척 모두 1976년 만들어진 유조선을 병원선으로 개조한 것이다. 머시함은 1986년, 컴포트함은 1987년에 각각 미 해군 소속 병원선으로 변신했다. 병원 임무를 위한 객실 모듈, 응급 환자 후송을 위한 헬리콥터 이착륙 갑판 등이 새로 설치됐다.

머시급 병원선은 병상이 모두 1000개가 있다. 이 가운데 500개는 경증 환자를 위한 것이다. 400개는 중간 단계의 환자 병상이며, 20개는 수술 후 회복용 병상이다. 나머지 80개는 중환자 병상이다. 병원선 안에는 치과 병원도 있다, X레이가 4대, CT 스캐너 1대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 또 산소 발생기가 2대 있으며, 시력 검사실도 있다.

매일 113만6000L의 물을 생산하며, 대규모 세탁 시설과 시신 안치소를 갖췄다. 의료 물자 창고와 약국도 있다. 움직이는 종합병원이라고 부를 만하다. 머시급 병원선은 항구에 정박했을 때뿐만 아니라 항해 중에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

길이 272m, 병상 1000개 갖춘 대형 병원급 

컴포트함은 뉴욕 배치 직전 모항인 버지니아주 노포크항에서 수리를 받고 있었다. 당초 미국 국방부는 컴포트함이 출항하려면 수 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육군 공병의 도움을 받아 8일 만에 수리를 마쳤다.

미국 해군의 병원선 컴포트함의 내부 병실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해군의 병원선 컴포트함의 내부 병실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원래 병원선의 임무는 전시 부상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컴포트함의 경우 걸프 전쟁 직전인 1990년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로 가 8700명의 환자를 돌봤다. 수술만 337건을 이 배에서 했다고 한다. 2002년 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했다. 머시함도 걸프 전쟁에 다녀왔다.

병원선은 평시엔 재난 구조나 인도주의 활동에 나선다. 머시함은 2013년 필리핀이 태풍 하이옌으로 타격을 입자 필리핀으로 출동했다. 컴포트함은 2010년 지진 피해를 본 아이티에서 환자를 받았다.

이처럼 유용한 병원선이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예산 부족에 허덕이는 미 해군이 2018년 머시급 병원선 2척 중 1척을 모스볼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모스볼은 군함을 퇴역시킨 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장기 보존 처리한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미 의회의 반대로 다행히(?) 무산됐다.

병원선을 하얗게 칠한 이유가 있다. 병원선이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기 위해서다. 중간 중간에 빨간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병원선은 국제법상 보호를 받는다. 이를 위해서 병원선은 전투 지역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야 한다. 군수 물자나 무장 병력을 실어서도 안 된다. 적국의 임검을 받더라도 승조원이나 의무 인력, 현역 군인인 입원 환자는 포로로 잡히지 않는다.

최초의 병원선은 아테네 ‘테라피아’ 

병원선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고대 아테네 해군은 테라피아(Therapia)라는 이름의 함선을 가졌다. ‘치료’를 뜻하는 선명으로 보면 이 배는 병원선일 가능성이 있다. 영국 해군은 1608년 굿윌이라는 배에 환자를 수용했다. 이후 병원선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는데, 주로 전투 부상자가 아닌 병에 걸린 환자를 치유하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영국 해군의 병원선 멜버른함을 소개한 기사. [사진 위키피디아]

.영국 해군의 병원선 멜버른함을 소개한 기사. [사진 위키피디아]

1860년 영국 해군은 근대적 병원선인 멜버른함과 모리셔스함을 보유했다. 멜버른함은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청과의 제2차 아편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77척의 병원선을 운영했다. 1912년 불행한 사고로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인 브리태닉호는 병원선으로 징발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과 추축국은 서로 상대의 병원선을 가라앉혀 국제법을 위반하기도 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은 미국 해군 따라쟁이다. 세계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겨루려면 미국 해군에 견줄 전력을 쌓아야 한다는 게 중국 해군의 논리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을 따라 항공모함도 짓고, 전략 핵잠수함도 건조했다. 그리고 병원선도 만들었다.

중국은 1980년대 남중국해 일대 기지 보급 임무를 위해 총사(瓊沙)급 수송선 6척을 건조했다. 90년대 총사급 1척이 병원선으로 개조됐고, 이후 1척이 더 병원선으로 바뀌었다.

이후 중국은 본격적인 병원선을 갖췄다. 중국의 좡허(庄河)급 병원선(함번 865)은 독일에서 만든 2만4000t급 컨테이너선을 사들여 2004년 병원선으로 개조한 것이다. 선수에 헬기 착륙장까지 만들었다.

90년대 이후 중국도 병원선 경쟁 시작 

크루즈선을 개조해 병원선으로 만든 다이산(岱山)함은 평시 허핑방저우(和平方舟)로 불린다. 영어로는 피스 아크(Peace Arkㆍ평화의 방주)다. 이 배는 2018~2019년 205일 동안 태평양과 남아메리카를 항해하며 288건의 수술을 진행하고 수만 건의 의료검진을 했다고 중국은 자랑했다. 특히 미국의 앞마당인 카리브해의 안티과와 버뮤다에서 의료 지원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은 지난해 9월 병원선 1척을 더 진수했다.

인민해방군 창군 70주년을 맞아 지난해 4월 중국 병원선인 다이샨함이 민간인에게 개방행사를 열었다. [신화통신]

인민해방군 창군 70주년을 맞아 지난해 4월 중국 병원선인 다이샨함이 민간인에게 개방행사를 열었다. [신화통신]

한국도 병원선은 아니지만 2018년 11월 진수한 해군의 훈련함인 한산도함(ATH-81)이 부족하나마 병원선 역할을 맡을 수 있다. 한산도함은 수술실 3곳과 진료실, 병실이 들어 있어 해난사고 의무지원, 구호활동 지원 등 다양한 임무에 투입할 수 있다.

병원선의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가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의 발병이 일상이 돼버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다. 미 해군 전쟁대학은 지난해 전문가 50명을 모아 팬데믹 확산 상황을 가정해 워게임을 벌인 뒤 권고 사항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병원선ㆍ야전 병원 설치와 같은 익숙하지 않지만, 광범위한 대응에 필요한 능력을 키워야 한다”이다.

19세기는 강대국이 포함을 보내 약소국의 문호를 강제로 열게 하는 ‘함포 외교’의 시대였다. 그러나 21세기엔 중국이 병원선을 보내 외국의 마음을 사는 ‘병원선 외교’를 교묘히 펼치고 있다. 미국이 손 놓고 바라볼 수만 없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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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전문 자유 기고가인 최현호씨는 “병원선은 직접 인도주의적 지원이 가능한 자산으로서, 그동안 미 해군의 능력을 보여주는 수단이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중국이 세계 각지로 병원선을 보내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산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의 병원선 외교는 일대일로의 확대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철재ㆍ박용한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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