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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재의 밀담

부하 살리려 ‘폭탄’ 끌어 안은 함장의 결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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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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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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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의 핵추진 항공모함은 패권 국가 미국의 상징이다. 최신형 항모인 포드함의 경우 길이 337m, 높이 76m에 무게(배수량)는 10만t이다. 옆에서 보면 웅장함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게다가 항모의 탑재 전투기, 항모 호위 전투함의 화력을 합치면 중소 국가보다 더 막강하다.

코로나가 미사일보다 위협적 #미 핵항모 대피 사태 벌어져 #‘부하 살려달라’ 함장 서한에 #지휘부, 트럼프 눈치 봐 외면

이처럼 금싸라기 전력이기 때문에 미 해군은 항모의 보호를 최우선 사항으로 여긴다. 그래서 중국이나 러시아 등 유사시 적으로 변할 수 있는 나라를 주시한다. 이들 국가의 미사일이나 잠수함이 가장 위협적이라 보고 이를 막는 수단을 마련하느라 열심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10만t급 항모를 돌려세운 건 결국 80~100㎚(1㎝=1000만㎚)의 바이러스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선내 확산 때문에 예정보다 빠른 지난달 27일(이하 현지시간) 괌에 입항한 항모인 시어도어 루스벨트함 얘기다. 그런데 루스벨트함의 입항 즈음에 벌어졌던 상황은 막장드라마를 뺨친다.

미 해군 항모 시어도어 루스벨트함의 브렛 크로지어 전 함장. 그는 승조원의 목숨을 구하려다 직위해제됐다. [로이터=연합뉴스]

미 해군 항모 시어도어 루스벨트함의 브렛 크로지어 전 함장. 그는 승조원의 목숨을 구하려다 직위해제됐다. [로이터=연합뉴스]

대강의 사건은 이렇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는 데도 승조원을 함에 머무르게 하자, 루스벨트함의 브렛 크로지어 전 함장은 지난달 29일 “전시가 아닌데 수병이 죽어선 안 된다”며 하선을 촉구하는 서한을 해군 지휘부에 보냈다. 지난달 31일 한 언론이 이 서한을 보도했다. 토머스 모들리 전 해군장관 대행은 지난 4일 크로지어를 보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5일 괌으로 가 루스벨트함 승조원 앞에서 “너무 순진하거나 멍청하다”고 크로지어를 비난했다. 미국에서 모들리의 발언을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자, 마크 에스퍼미 국방부 장관은 7일 모들리의 사표를 수리했다.

모들리가 크로지어를 자른 이유는 ▶서한을 보안 e메일이 아닌 일반 e메일로 보냈고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하지 않았으며 ▶언론에 유출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 해군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 막전막후 사정을 밝히는 댓글이 속속 올라왔다.

댓글의 내용을 종합하면 크로지어는 서한 발송 이전에 자신의 직속 상관인 항모강습단장(준장)에게 심각한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러나 단장은 “배와 승조원의 안전에 대한 결정은 함장이 내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속 부대인 3함대에 연락했지만, “현재 7함대 작전구역(서태평양)에 있으니 우리 소관이 아니다”는 답을 들었다. 그리고 태평양함대와 7함대는 “계속 선내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급하면 모들리에게 직접 연락하라며 그의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줬다고 한다. 크로지어는 정식 계선을 밟아 보고했는데도 ‘폭탄’을 돌리려고만 하는 지휘부에 실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크로지어가 언론에 흘렸다고 의심을 받은 것은 처음 서한을 보도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이 그의 고향 신문이라서다. 그런데 크로지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80㎞ 떨어진 산타로사에서 나고 자랐다.

지난달 27일 시어도어 루스벨트함이 예인선에 끌려 괌에 입항하고 있다. [사진 미 해군]

지난달 27일 시어도어 루스벨트함이 예인선에 끌려 괌에 입항하고 있다. [사진 미 해군]

미 해군 지휘부는 무엇보다 루스벨트함의 전투태세를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루스벨트함은 직전까지 남중국해에서 훈련을 벌이며 중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루스벨트함이 이탈하면 아시아·태평양에서 중국 해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지난 11일 중국은 항모인 랴오닝(遼寧)함 등 6척을 동원해 일본 오키나와 본섬과 미야코지마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으로 나갔다.

그러나 루스벨트함 사태는 힘의 공백보다 더 큰 상처를 미 해군에 남겼다는 평가다. 미 해군에 리더십의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미 해군 사정에 정통한 예비역 제독은 “모들리의 전임자인 리처드 스펜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해 전격 경질됐다”며 “모들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려다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매체인 비지니스 인사이더는 모들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크로지어를 해임했다고 보도했다. 모들리는 나중에 “내 결정”이라고 밝혔지만, 이 말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윤석준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입맛에 맞는 사람만 뽑으면서 미군에서도 정치화가 심해졌다”며 “‘코로나19 대처를 잘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미 해군 지휘부가 크로지어의 보고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미 해군은 가장 우수한 대령을 항모 함장으로 앉힌다. 크로지어는 입을 다물고 지시만 따랐으면 별을 달 수 있었다. 부하를 살리려고 진급을 포기한 셈이다. 이 때문에 크로지어가 2일 작은 배낭을 메고 루스벨트함을 떠날 때 수백 명의 승조원이 박수를 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런 함장에게 상을 주기는커녕 깎아내린 모들리의 행태는 선장이라면 모름지기 배와 선원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뱃사람의 불문율을 무시한 것이다.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한국군엔 모들리 같은 지휘부가 없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 코드에 맞는 군 지휘부가 들어선다. 이들은 안보 대계를 세우기보다는 정권의 국정 과제를 이행하느라 바쁘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은 크로지어 같이 용기 있는 지휘관이 드물다는 점일 게다.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