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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장·차관들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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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정부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22일 정부 부처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서울청사에서 신종 코로나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영혼 없는 공무원’은 위기일 때 본색을 드러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는 정부 부처 공무원을 취재하며 든 생각이다. 최근 장ㆍ차관, 혹은 장ㆍ차관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는 고위 공무원을 만나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위(청와대)에서 시키니까 해야지요”다. 방향이 틀리면 속도는 의미가 없다. 능동적으로 대처해도 부족할 판에 수동적인 보여주기로 일관한 공무원을 여기 기록한다.

경제 컨트롤타워 A 장관은 ‘예스맨’으로 불린다. 선제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떠밀리기의 연속이었다. 지난달까지도 빨간 불을 켜기보다 “경기 개선 신호가 뚜렷하다”며 낙관론을 폈다. 머뭇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내 실기(失機) 논란도 빚었다. 추가경정예산안(추경) 편성 논의가 불붙자 “올해 예산안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추경을 언급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추경 증액을 논의한 11일 당ㆍ정ㆍ청 회의에도 불참했다. 결국 추경은 뒤늦게 국회를 통과했다. 2차 추경 논의까지 불붙었다.

다른 경제부처 B 장관은 “마스크 때문에 죽겠다”고 했다. ‘마스크 대란’ 때문에 국민 반발이 불붙자 본인까지 어쩔 수 없이 뛰어들었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정부가 왜 이렇게까지 마스크 문제에 달라붙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뿐 아니라 부하 공무원들까지 다 마스크 문제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나라에 큰 도움이 될까요.”
그럼 지금이라도 마스크 말고 다른 이슈를 챙기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미 위에서 책임지고 어떻게든 챙기겠다고 했는데 나라고 어떡하냐”는 답이 돌아왔다.

C 장관은 요즘 열 일 제치고 현장만 찾는다. 정책 부처가 아닌 집행 부처라 신종 코로나 대응과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최근 일정 대부분이 ‘현장 방문’이다. 마스크 생산업체, 정보기술(IT) 업체, 자동차 부품업체까지 연일 강행군이다. 현장 애로사항을 듣겠다는 건데 오히려 현장에서 불편하단다. 밤낮없이 24시간 공장을 돌리는 마스크 생산업체가 장관이 온다고 해서 반가울까. 손님이 뚝 끊긴 대전 번화가의 한 상인은 “장관 사진 찍기에 동원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참모진은 “위에서 가라는데 별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D 차관은 요즘 TV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가 많다. 마스크 수출 금지, 매점매석(사재기) 단속 업무를 실제 집행하는 부처 수장이라서다. 단속반은 주말도 반납하고 현장을 뛰고 있는데, 그는 브리핑에 앞서 단장을 하는데 시간을 쓴다고 한다. 이 부처는 마스크 105만장 사재기를 단속했다는 본지 단독 취재에 대해 “조만간 처장이 브리핑에서 직접 발표할 예정이니 그때 보도할 수 없냐”는 황당한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도 있다. 정부는 21일 장ㆍ차관급 공무원 급여의 30%를 4개월간 반납한다고 발표했다. 고통 분담 취지에서다. 하지만 현장에선 “2020년에 1960년대식 황당무계한 발표가 기업에 오히려 부담을 준다”는 반응이 나왔다. 보여주기식, 촌스러운 급여 반납 지침 대신 적자 재정을 내서라도 기업이 근로자 임금을 삭감하지 않도록 지원하겠다는 대책을 냈으면 어땠을까.

공무원의 꿈이라는 부처 장ㆍ차관마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밑에서 아니라고 거스르긴 더 어려울 것이다. 비상시국일수록 영혼을 붙들어 매야 한다. 누군지 다 알만한 얘기를 굳이 AㆍBㆍCㆍD로 가려 쓴 건, 위로부터 닦달은 좀 덜 받고 소신대로 일하라는 바람에서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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