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30일 문 잠근 트럼프···"눈덩이 무역적자 역풍 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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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저녁 9시(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공식 인정한 후 열린 회견이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산을 저지할 만한 획기적 대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회견 시작과 함께 실망으로 바뀌었다. 주목할 만한 내용은 유럽에서 오는 여행객의 입국을 30일간 제한하겠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입국 제한 대상은) 여행객과 화물,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했다.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의 레이건 국립공항. 연합뉴스

1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의 레이건 국립공항. 연합뉴스

발언 직후 파장은 컸다. 유럽과의 무역 중단 선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회견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글을 올렸다. 실언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다. “유럽으로부터의 30일 입국 제한 조치는 상품이 아닌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오락가락’ 행보는 시장의 불안만 키웠다. 아시아 증시의 반응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 시간으로 12일 오전 10시에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의 회견 이후 아시아 증시는 빠르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코스피는 이날 오후 한때 5% 넘게 추락하며 ‘사이드카(주가 급등락시 매도 호가 효력을 일시 정지)’가 9년 만에 처음 발동됐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하루 사이 4.41% 내려가며 1만9000선이 붕괴했다. 대만 자취안(-4.33%), 홍콩 항셍(-3.71%), 중국 상하이종합(-1.52%) 등이 동반 하락하며 아시아 증시는 ‘검은 목요일’을 함께 맞았다.

미국 외교관계위원회(CFR)의 에드워드 앨든 선임연구위원은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이번 입국 제한 조치는 신중하지 못한, 무지한 결정”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이미 미국에 충분히 퍼져있다”며 “다른 국가와 긴밀하게 협력해 확산을 막아야 하는데 (여행 제한 조치는) 단순하게 (유럽의) 복수만 부를 것”이라며 “그리고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 가운데 미국이 신뢰할 수 없는 국가가 됐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격”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조치가 자칫 유럽과의 무역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1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항공ㆍ여행 등 미국 내 산업에 미칠 타격도 무시할 수 없다. 11일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크게 하락한 것도 미국 항공 제조사 보잉, 호텔업체 힐튼 등의 자금난이 불거졌기 때문이었다. ‘눈덩이’ 무역 적자로 고생하는 미국에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다. 유가 전쟁과 코로나19로 내상을 입은 미국 경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입국 제한 조치로 고민 하나를 더 안게 됐다.

영국 언론 가디언은 “스테판 밀러는 책임을 돌릴 대상으로 유럽을 택한 것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밀러 백악관 선임고문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연설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민 반대 강경파다. 가디언은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 침체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위기가 아니다. 일시적 현상으로 우리는 이겨낼 것”이라며 “아주 대부분의 많은 미국인에게 (코로나19로 인한 위험은) 매우 적다”고 강조했다.

미국 시사지 더 애틀랜틱은 “유럽 여행 금지는 전형적인 트럼프식 계산이다. 깊은 생각 없이 세계를 상대로 벽(wall)만 세우는 격”이라며 “검사 기기가 부족한 탓에 아직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적지만 조만간 빠르게 급증할 전망”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아프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현숙ㆍ배정원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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