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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태용의 한반도평화워치

북한 위협에 제재 완화하면 비핵화 기회 영영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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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굴종의 평화’에서 벗어나기

왼쪽부터 무인표적기를 향해 발사되는 한국 패트리엇 미사일, 북한이 지난해 11월 발사한 초대형 방사포. [중앙포토, 연합뉴스]

왼쪽부터 무인표적기를 향해 발사되는 한국 패트리엇 미사일, 북한이 지난해 11월 발사한 초대형 방사포. [중앙포토,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처음 만난 지 1년 8개월이 지났지만, 북한 비핵화는 감감무소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에 찔끔했던 북한은 벼랑 끝 전술, 살라미 전술, 미국 적대시 정책에 책임 전가 전술 등 전가의 보도를 총동원하며 비핵화를 거부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그동안의 미·북 협상을 평가해보자.

대북 제재로 외화 급감한 북한, 경제 위기 올 가능성 #북한은 고강도 도발 카드 내밀며 판 흔들려 할 수 있어 #한국 정부는 희망적 사고의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 #비핵화 실패에 대비, 한·미 연합방위태세 강화해야

첫째, 이벤트는 많았으나 실제 진전은 미미하다. 북한이 취한 조치는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뿐이다. 그나마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미·북 회담 이전에 이뤄진 조치들이다. 미·북 정상이 세 차례, 남북 정상이 네 차례, 북·중 정상이 다섯 차례 만났지만, 비핵화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둘째, 북한의 비핵화 약속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조선반도 비핵화’가 국제사회가 기대하는 북한의 핵 포기와 다르다는 것은 이제 중국마저도 인정하는 상식이 됐다. 우리 정부는 김정은이 비핵화 결단을 내렸다고 공언해 왔는데, 북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인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태도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국제사회에서 우리에 대한 신뢰를 적지 않게 손상했다.

셋째, 한·미 연합방위태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에게 일언반구 없이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라는 큰 선물을 줘버렸다. 반대로 북한은 중단했던 미사일 발사를 재개하여 신형 단거리 미사일과 신형 대구경 조종 방사포를 13차례나 발사했다. 또 김정은은 북방한계선에서 불과 18㎞ 떨어진 창린도에 와서 해안포 발사를 지휘했다. 이들 도발은 우리에게 큰 위협인데도 미국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정부도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안보를 한국 정부가 신경 쓰지 않으면 어느 나라가 관심을 갖겠는가.

대북 제재 해제는 북한만 이롭게 해

넷째, 통미봉남이 굳어지고 있다. 동맹국과 주적이 우리가 없는 자리에서 협상을 벌이는 자체가 잠재적 위기상황이다. 그래서 역대 한국 정부는 미국이 북한과 협상을 하게 되면 마치 우리가 협상장 안에 있는 것처럼 ‘빛샐 틈 없는’ 공조를 요구해 왔다. 그런데 하노이 미·북 회담 당일 오전까지도 우리 정부는 회담 결렬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또 미·북 정상의 판문점 회동 때 우리 정상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아무런 역할을 못한 것은 우리의 딱한 처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잠깐이라도 문재인 대통령과 3자 회동을 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끝으로 북한의 배은망덕과 적반하장이 일상화됐다. 한때 쿠바 외에는 인사 교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립됐던 북한의 숨통을 터준 것은 우리 정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북 정상회담도 우리 정부의 특사외교가 길을 열어주었다. 북한으로서는 감사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우리 대통령을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일”이라는 등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모욕하고 있다.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또 우리의 F-35 전투기 도입은 남북 군사합의 위반이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네는 해안포 발사 같은 명백한 위반 행위를 벌이는 적반하장은 또 뭐란 말인가.

지난해 말 북한은 마치 고강도 도발을 할 것처럼 말 폭탄을 쏟아냈지만, 결국 ‘연말 선물’도, 김정은 신년사도 없이 해를 넘겼다. 중국의 설득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고강도 도발에 필요한 기술적 준비가 안 됐을 가능성이 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창궐과 미국의 이란 솔레이마니 쿠드스군 사령관 제거로 앞으로 몇 달간 김정은의 운신 폭은 상당히 제한될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은 조만간 도발 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판을 흔들려 할 것이 분명하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대로 대북 제재로 북한이 보유한 외화가 급감하면서 물가와 환율이 치솟는 경제 위기가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도발에 나서면 “전쟁은 절대 안 된다” 면서 “제재를 풀어 북한을 달래자”는 주장이 국제 사회는 물론 국내에서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는 몰라도 대한민국은 그런 선택을 해선 안 된다. 북한 비핵화의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영영 닫아버리게 될 뿐 아니라 사실상 핵무장국 북한 앞에서 ‘굴종의 평화’를 택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한·미 연합훈련이 영구 폐기되고 한·미 동맹이 군사적으로 이격(decoupling)될 위험성도 높다.

완전한 비핵화 목표 하향 조정 없어야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완전한 비핵화 목표를 하향 조정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특히 핵 폐기 시간표가 없는 동결 합의는 금물이다. 만약 신뢰할만한 핵 폐기 로드맵이 합의된다면 첫 단계로 북한은 은닉 농축시설이 포함된 핵시설 가동 중단을 국제 검증 아래 시행하고 국제사회는 제재를 부분적으로 완화해주는 것은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순항한다면 경제적 반대급부를 넘어 우리 안보에 중요한 문제들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의제 하에서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다. 한·미 동맹, 주한미군, 확장억제, 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 등이 핵심 이슈가 될 것이다. 긴밀한 한·미공조를 통해 우리 안보에 해악을 끼치는 ‘나쁜 거래’가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북한 도발은 우리가 굴복 않으면 효과 없어

지난 수십년간 국제사회는 북한이 안전 보장, 미·북 관계 정상화, 경제 지원 등을 받는 대신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해 왔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본질적으로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설사 북한이 안전 보장 약속을 받고 미국과 수교하며 상당한 경제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이것이 북한의 체제 안전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경제 발전만 해도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늘어날 외부와의 접촉을 잘 통제하지 못하면 ‘독이 든 사과’처럼 오히려 체제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비핵화는 30대인 김정은 위원장이 장래를 내다보며 핵 포기의 결단을 내려야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김정은의 선택을 핵이냐 경제냐, 핵이냐 체제 안전이냐의 양자택일로 좁혀야 한다.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보다 핵무기를 포기하고 경제 발전의 기회를 갖는 것이 낫겠다고 김정은이 판단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를 일관되게 지켜낸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끝으로 북한의 도발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수도권을 겨냥한 장사정포 등 북한이 우리에게 피해를 줄 능력은 상당하지만, 북한이 실제 도발에 나설 경우 한·미 동맹은 북한에 훨씬 더 심대한 타격을 가할 능력과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상황이 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김씨 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군사적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북한이 승리를 거두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북한 핵 능력이 고도화됐다지만 미국의 확장억제가 굳건하게 유지되는 한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북한도 똑같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대북 억제력이 유지되고 있다. 결국 북한의 도발은 본질적으로 위협 카드다.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한 쉽게 먹히는 카드가 아니다.

지난 1년 8개월은 사실상 핵무장국이 된 북한의 비핵화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북한이 그토록 원했던 미·북 정상회담도 비핵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협상을 통한 비핵화가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필요한 대비를 하는 것이 합리적 자세다. 특히 한국형 3축 체계(3K) 구축 가속화, 한·미 연합방위태세와 확장억제의 실행력 강화가 핵심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급한 일은 우리 정부가 희망적 사고의 집단 최면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키워드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8월 “북한이 미국을 위협하면 지금껏 전 세계가 보지 못한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잇단 시험 발사와 핵탄두 소형화 성공, 괌 포위 사격 위협 등을 했다.

한국형 3축 체계(3K)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국방부의 핵심 전략. ‘핵·WMD(대량살상무기) 대응체계’라는 용어로 변경됐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징후를 탐지해 선제 타격하는 1축 킬 체인(Kill Chain)은 ‘전략표적 타격’으로, 2축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는 ‘한국형 미사일방어’로, 핵·미사일로 공격받은 뒤 가차없이 보복하는 3축 대량응징보복(KMPR)은 ‘압도적 대응’으로 대체됐다.

조태용 전 외교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