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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과 시마즈 나리아키라, 그리고 로버트 리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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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호 면

[유주현 기자의 컬처 FATAL]

“거기서 이미경이 왜 나와?”
지난 9일 아카데미 시상식에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등장해 작품상 수상소감을 한 것이 논란이다. 작품상 수상자도 아니고, 재벌 3세가 개인 돈을 후원한 것도 아니고 돈 될만한 영화에 회사 돈을 투자했을 뿐인데, 한국 영화와 아카데미의 역사적인 순간에 등장한 게 ‘기생충의 현실판’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번 수상에 CJ의 대규모 마케팅과 아카데미 캠페인이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수상소감을 말하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제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수상소감을 말하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한국 영화계에서 CJ의 공과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혹자는 1990년대까지 독점적인 배급망과 불투명한 경영의 구습에 젖어있던 후진적인 한국 영화판에 뛰어들어 박찬욱, 봉준호 같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멀티플렉스 시대를 활짝 연 CJ와 이미경이 아니었다면 ‘기생충’의 영광도 없었다고 추켜세운다. 정반대로 CJ와 롯데 같은 대기업이 수직계열화로 영화계 전체를 접수하고 중소 제작사·배급사의 씨를 말렸기에 한국영화의 다양성이 실종됐다고 보기도 한다.

이 논란을 마주하며 예전 가고시마 여행에서 만난 풍경이 떠올랐다. 메이지 유신 유적이라길래 막연히 ‘유신 3걸의 대장 격인 사이고 다카모리의 생가인가?’ 싶어 방문했던 ‘센간엔’은 알고보니 당시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가문의 별장이었다. 철제 대포를 제조하기 위해 지은 반사로 터, 사쓰마 특산품인 아름다운 유리 제품 ‘사쓰마 기리코’ 공장 등, 제 11대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유산이 남아있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일찍이 선진문물에 눈을 떠 부패한 에도 막부의 독재를 저지하고 일본에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도입해 ‘새로운 일본’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었다.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비해 총기와 대포 등 최신식 무기를 개발하고 '사쓰마 기리코'같은 서양과 교역할만한 특산품 개발에 매진해 당대 일본의 270여개 번 중 사쓰마를 가장 앞서가는 번으로 세운 게 그다. CJ가 ‘설탕 팔아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영화에 투자한 것처럼, 사쓰마도 ‘아마미오시마’라는 번의 부속섬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를 팔아 무기제조 등 부국강병에 투자했다고나 할까.

NHK 대하드라마 '세고 돈'에서 시마즈 나리아키라 역을 맡았던 와타나베 켄.

NHK 대하드라마 '세고 돈'에서 시마즈 나리아키라 역을 맡았던 와타나베 켄.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무엇보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막부 말기의 인재를 길러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수많은 가신들에 둘러싸인 영주로서 일개 하급무사의 자질을 꿰뚫어본 안목이 놀랍다. 우직하지만 인정 많고 못가진 자들을 돌아보는 사이고를 가신으로 중용해 거물급 정치인으로 키워낸 것이다. 하급무사들의 혁명인 메이지 유신의 초석을 다진 것이 가장 앞서가던 번의 영주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당대의 ‘금수저’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도 다이묘가 되는 길이 수월하진 않았다. 부친인 선대 다이묘 시마즈 나리오키가 배다른 동생 히사미츠를 후계자로 낙점하고 나리아키라의 앞길을 노골적으로 가로막았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이묘가 됐지만, 그는 ‘새로운 일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불의의 죽음을 맞았다. 당시 권력자들은 가문 내 권력다툼에서 숱하게 독을 먹고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기에 병약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충성심 강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믿고 키워준 주군을 잊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나리아키라의 평생의 뜻을 대신 이루겠다며 뚝심있게 밀어부쳐 메이지 유신을 완성했고, 두 사람의 스토리는 현대 일본인들에게도 존경받고 있다.

12일 국립극장에서 NT라이브로 관람한 연극 ‘리먼 트릴로지’에서 또 한 명의 ‘금수저’를 만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파산한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창업가문의 마지막 이사진이었던 로버트 리먼이다. 1844년 독일에서 빈손으로 미국에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인 리먼 3형제 헨리, 임마누엘, 메이어가 목화 중개업으로 시작해 거대한 금융제국을 일군 것이 리먼 브라더스인데, 로버트는 임마누엘의 손자로 3세 경영인이었다.

연극 '리먼 트릴로지'. Adam Godley, Simon Russell Beale and Ben Miles in The Lehman Trilogy at the National TheatreA co-production with Neal Street Productionsby Stefano Massiniadapted by Ben Power Production teamDirectorSam MendesSet DesignerEs DevlinCostume DesignerKatrina LindsayVideo DesignerLuke HallsLighting DesignerJon ClarkMusic and SoundNick PowellMovementPolly Bennett        Photo by Mark Douet

연극 '리먼 트릴로지'. Adam Godley, Simon Russell Beale and Ben Miles in The Lehman Trilogy at the National TheatreA co-production with Neal Street Productionsby Stefano Massiniadapted by Ben Power Production teamDirectorSam MendesSet DesignerEs DevlinCostume DesignerKatrina LindsayVideo DesignerLuke HallsLighting DesignerJon ClarkMusic and SoundNick PowellMovementPolly Bennett Photo by Mark Douet

1925년부터 리먼 브라더스사를 대표한 로버트는 1929년의 뉴욕 주식시장 폭락과 1930년대 경제 공황기를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극복했다. 주식거래가 급감하자 지금의 벤처 캐피털과 같은 사업 모델을 만들어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 회사들의 비상장 주식에 과감히 투자해 주식시장이 안정된 이후 거대한 차익을 실현하고 세계 최대의 재산가로 등극하기도 했다.

연극 '리먼 트릴로지'. Adam Godley, Simon Russell Beale and Ben Miles in The Lehman Trilogy at the National TheatreA co-production with Neal Street Productionsby Stefano Massiniadapted by Ben Power Production teamDirectorSam MendesSet DesignerEs DevlinCostume DesignerKatrina LindsayVideo DesignerLuke HallsLighting DesignerJon ClarkMusic and SoundNick PowellMovementPolly Bennett        Photo by Mark Douet

연극 '리먼 트릴로지'. Adam Godley, Simon Russell Beale and Ben Miles in The Lehman Trilogy at the National TheatreA co-production with Neal Street Productionsby Stefano Massiniadapted by Ben Power Production teamDirectorSam MendesSet DesignerEs DevlinCostume DesignerKatrina LindsayVideo DesignerLuke HallsLighting DesignerJon ClarkMusic and SoundNick PowellMovementPolly Bennett Photo by Mark Douet

사업만 열심히 한 건 아니다. 영화와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미술품 컬렉션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이사장도 지냈다. 1968년에는 그의 문화 분야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한 예일대학이 명예박사학위를 주기도 했다. 그의 사후 로버트 리먼 재단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로버트 리먼 별관’을 증축해 주고 3000점이 넘는 미술품을 기증했는데, 덕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르네상스와 후기인상파 작품을 다량 소장한 미술관으로서 그 명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CJ 이미경 부회장도 왠만한 영화평론가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영화광으로, 그 애정을 영화판에 아낌없이 쏟고 있다고 한다. 봉준호, 박찬욱을 알아본 뛰어난 안목과 과감한 투자로 한국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금수저가 되기 위한 조건은 뭘까. 특히나 ‘기생충’이 적나라하게 꼬집은 계급갈등과 불평등 문제가 첨예한 한국 사회에서 말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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