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칙한 정부기구 개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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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정부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가, 「큰 정부」를 지향하는가. 정부가 행정개혁위원회의 정부조직개편안을 건의 받고 내린 결정을 보면 정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초 정부의 뜻은 분명히 「작은 정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노 대통령의 선거공약이기도 했고 행개위 작업의 전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행개위의 개편안에 대한 정부결정은 거꾸로 「큰 정부」를 지향하는 쪽이었다.
정부는 행개위의 개편안중 줄이자는 쪽은 무시하고 늘리자는 쪽만 받아들였으니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큰 정부」가 나쁘고 「작은 정부」가 좋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정부가 하는 일에 원칙과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큰 정부」가 좋은지, 「작은 정부」가 좋은지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고 사람에 따라 의견도 다르다. 권력=악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지난날 권위주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점점 더 복잡해지는 우리 사회의 관리와 조정, 국가기능에 의한 정의·형평의 확보, 복지의 확대 등의 필요성을 생각한다면 「큰 정부」는 나름대로 훌륭한 논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부의 국가 경영철학과 관련해 판단할 문제며, 최소한 이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가겠다는 나름대로의 의지나 비전에 입각해 결정할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정부결정을 보면 국가경영철학은 커녕 나름대로의 기준이나 비전도 있는 것 같지 않다. 불과 1년여 전에 그렇게 「작은 정부」를 고창하면서 각계 전문가들을 동원해 개편안까지 마련해놓고 어떻게 불쑥 「큰 정부」쪽으로 갈 수 있는가.
가령 그동안의 상황변화나 집권경험에서 생각해보니 도저히 「작은 정부」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선 끝에 나온 결정이라면 그것은 좋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결정과정을 보면 작은 정부와 큰 정부 중 어느 것이 더 낫다는 기본적 판단을 해보려는 노력도 없었던 것 같고 사실상 기구확대를 하면서도 자기들의 기본방침이 작은 정부인지, 큰 정부인지 방향이 잡혀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여전히 작은 정부가 방침이라면 그런 방향으로 정부 기구를 조정해야 한다. 방향을 바꾸어 큰 정부를 지향한다면 먼저 국민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 최소한의 납득이나마 얻은 후에 그렇게 추진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기본적인 판단도 없는 것 같고, 설명을 하거나 납득을 구하는 노력도 없다.
그저 관료이기주의에 따라 현실 안주의 결정을 했다는 인상뿐이다. 어느 기구든 폐지하자면 관련 관료의 반발이 있게 마련이고, 그에 따라 자기기구를 지키려는 로비가 치열해지는데 이번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어떤 기구든 그 나름대로의 존립 근거는 다 있는 법이다. 이런 개별적 합리성과 이유를 일일이 존중한다면 개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작은 정부를 하자면 개혁의지가 있어야 하는 데 이번 정부결정을 보면 정부는 개혁의지도 없이 구호로만 작은 정부를 외쳐온 것 밖에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도로로 끝난 행개위 작업에 소요된 인적·물적 낭비 등을 거론할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국정을 운영·집행하는데 있어 원칙과 기준과 절차가 있어야한다는 점과 기존의 원칙과 기준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국민에게 그 필요성을 납득시킨 후 새로운 원칙과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정부조직 개편문제에서 보인 것과 같은 무원칙과 현실 타협적 자세가 국정의 다른 분야에서 또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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