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기업가와 근로자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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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나라 여대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업가로 최근 뽑힌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펴낸바 있다. 이 책 또한 장안의 종이 값을 올릴 만큼 인기가 높아서 수십만 권이 팔렸다고 한다.『자본금 5백만 원과 직원 5명으로 맨 처음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을 때 나에게는 큰 꿈이 있었다. 김 회장의 그 꿈은 10년만에 국내최대의 빌딩을 갖게 했고 그 다음엔 그 큰 빌딩 속에 대우직원을 가득 채울 만큼 회사를 키우는 일이었으며 그 꿈 또한 5년 안에 이뤄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꿈이 있다면 존경받는 기업인으로서「김우중」이라는 이름이 기억되는 것이라고 했다.
김 회장의 크고 작은 꿈을 현실로 이룩하는데는 그의 탁월한 경영철학과 비상한 두뇌가 전제되겠지만, 그의 성공의 비결은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근면성, 그리고 이를 뒷받침한 용의주도한 시간 절약임을 그 책은 시사한다.『나는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 하루가 30시간이나 40시간쯤 되었으면 좋겠다』는 김 회장 자신의 말대로 그는 정녕 가장 바쁘게 일하는 기업가임에 분명하다.
김 회장의 꿈과 시간철학을 담은 에세이가 출간된 다음, 얼굴 없는 시인이며 선진 노동이론가로 이미 익히 알려진 박노해씨가『김우중 회장의 자본철학에 대한 전면비판』이라는 글을 노동해방문학(9월 호)에 싣고있어 기업총수와 노동이론가간의 첨예한 시각대립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사뭇 도전적인 어투로 시작된 박노해씨의 비판은 먼저「김 회장의 꿈」부터 짓밟기 시작한다. 젊은 노동자의 꿈이란 게 고작 기숙사생활 벗어나 월세 방 한 칸 얻는 꿈, 5년 동안 뼈빠지게 모아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는 꿈, 피땀 흘려 일해 20년 후면 구멍가게 하나 얻거나 손바닥만한 내 집 장만이 하려한 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의 이 꿈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 뿐인데 어째서 김 회장의 꿈은 승승장구만 했던가. 노동자는 잠만 퍼 자고 노력은 안 했는가. 철야와 특근을 밥먹듯이 하고 보너스 한푼에 비지땀을 흘렸지만 노동자의 꿈은 피어나질 못했다.
한때 대우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밝힌 박노해씨의 비판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당신에게 노동을 착취당하고 시간을 내 빨리고 청춘과 영혼과 생명과 인간성을 파괴당한 대우노동자들의 존재이자 생명인 시간을 앗아감으로써 오늘의 대우왕국을 확대했다』고 주장한다.
박 정권의 특별배려와 파격적인 금융지원, 특권과 특혜, 그리고 노동착취가 한데 어울려 거대기업의 오늘을 이룩했다고 그는 공박한다.
개발독재라 불릴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시작된 몇몇 대기업의 부심과 성쇠과정을 지켜보았던 우리들로서는 이 상반된 시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대 기업가의 꿈과 노동자의 꿈은 이토록 어긋나야만 하는가.
오늘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리더로서 기업가에게 보내는 찬사와 함께 5명의 직원에서 50만 명의 식구로 늘어난 비약적 발전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특혜와 특권으로 태어난 기업이 부실기업을 낳고 그 부실을 메우기 위한 특혜와 특권이 또다시 동원되고있는 얼룩진 기업의 성장 비사에 대해 누구나 거부감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우리 경제의 비약적 성공 뒷면에는 풍부한 노동력, 값싼 임금, 근면한 노동정신이 절대적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모두가 인정하면서도 민주화 시기 2년 동안 1조 몇 백억 원의 빚더미에 눌려 파산직전에 놓여있는 기업체 안에서 50여%의 월급과 상여금의 인상을 요구하며 증오와 핏발 선 눈으로 노동해방만을 외쳐대는 일부 노동자들의 구호에 모두가 차가운 시선을 보냈음도 또한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었다.
이미 역사의 지평선 위에서 황혼 녘으로 넘어가는 노동의 해방,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시대적 종언을 나날이 신문과 방송을 통해 눈앞의 현실로 확인하는 판에 노동해방이 역사발전의 필연적 법칙이라는 시대착오적 노동이론가의 목소리에 어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기업가와 노동자에 대한 이처럼 엇갈린 시각이 어떤 경로, 어떤 과정을 거쳐 정리되고 화합되어야할 것인가.
자본주의의 원조라 할 애덤 스미스는 이럴 때를 예비해서『도덕감정론』이라는 철학을 일찍이 개진해 놓았다.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일어날 가해자와 피해자의 판단을 어떤 도덕, 어떤 정의에 따라 판단할 것인가.
그의 철학은 동감의 이론 위에서 출발한다. 부정이라고 판단하고 처벌하는 근거를 공정한 관찰자(Impatial Spectator)의 가해자에 대한 반감과 피해자에 대한 동감에서 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해자의 분개가 이해관계 없는 제3자에 의해 동감으로 느껴질 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정의로운 것이 된다.
여기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노동자의 분개를 제3의 관찰자인 국민이 얼마나 큰 동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또는 기업가의 화려한 꿈에 대해 어떤 반감을 보일 것인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일은 건실한 자본의 정당한 몫을 인정할 줄 알고 노동의 질에 따른 정의로운 대가를 요구하고 챙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풍토가 제자리를 잡아간다면 노동자의 꿈이나 자본가의 꿈은 크게 어긋나지 않으리란 점이다.
이 논쟁 가운데서 노출되고 있는 반감의 요인들을 서로가 증폭시키는 쪽으로 나가기보다 반감의 요인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해소하는 쪽으로 서로 노력한다면 동감의 일체화 또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때야 비로서 시업가와 노동자에 대한 동감과 반감의 엇갈린 교우는 동감의 일체감으로 제3의 관찰자들에게까지 파급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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