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피플] 트럼프 “멍청이” 도발에도 “원칙” 갈 길 가는 금욕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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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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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더 큰 적은 누구인가. 파월인가, 시진핑인가(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첩보소설 즐기는 홀로족 Fed 의장 #트럼프 “금리 인하” 압박 못들은 척 #“고용·물가안정, 의회가 부여한 사명” #정치적 고려 않고 Fed 독립성 지켜

“나와 동료들은 정치적 고려 없이 통화정책을 수행할 것임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트럼프가 자신의 손으로 임명했지만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인물이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파월(67) 의장이다. 2018년 2월에 취임해 4년 임기의 절반을 도는 파월의 심경은 편치 않다. 트럼프가 ‘배신자’‘멍청이’라며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지 않아서다.

그런데도 파월의 선택은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면 차분하게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재확인하는 게 전부다. 뉴욕타임스는 파월에 대해 “무대 뒤에서 조용히 고군분투하는 실용주의자”라고 평가했다. 1990년대 Fed 부의장을 지낸 앨런 블라인더는 “역대 대통령에겐 볼 수 없었던 유치한 언어에 기개와 품위로 대응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취임 후 첫 1년간 파월은 네 차례 기준금리를 올렸다. 지난해 8월을 고비로 180도 방향을 바꿔 세 차례에 걸쳐 금리를 내렸다. 지난해 10월 말부터는 연 1.5~1.75%를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더 빨리, 더 많이 금리를 내리지 않는다고 성화지만 파월은 요지부동이다. Fed가 고려할 사항은 대통령의 정치적 압력이 아니라 법률이 규정한 사명(고용 극대화와 물가안정)이라는 소신에서다.

트럼프

트럼프

지난달 28~29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도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파월은 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의회가 부여한 사명, 즉 고용 극대화와 물가안정의 달성에 최선을 다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때마다 빼놓지 않는 표현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금융시장 전문가 20명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이 트럼프의 도발에 대한 파월의 금욕주의를 칭찬했다”고 소개했다. 뉴욕타임스는 “파월의 조용한 접근은 깊은 전략의 일부”라며 “Fed가 엘리트의 신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공직자들의 집합이란 확신을 미국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파월은 1953년 워싱턴의 법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참전 후 변호사로 일했고 외할머니는 미국 가톨릭대 법대 학장을 지냈다. 파월은 성장 과정에서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톨릭계 기숙학교를 졸업한 뒤 학부(프린스턴대)에선 정치학, 대학원(조지타운대)에선 법학을 전공했다.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사생활에서도 드러난다. 뉴욕타임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첩보소설(본격 문학작품이 아닌 대중소설)을 즐기고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고 소개했다.

월가의 투자은행과 법무법인에서 일했던 파월은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Fed 의장으론 약 40년 만에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역대 Fed 의장들과 스타일이 아주 다르다. 예컨대 앨런 그린스펀 전 Fed 의장(재임 1987~2006년)은 자신의 발언이 어느 한쪽으로 해석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내가 한 말을 분명하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반면 파월은 ‘쉬운 영어’로 대중과 소통하려 한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언급에서도 파월의 솔직한 면모가 나타났다. 그는 “(신종 코로나는) 매우 심각한 이슈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뭐라고 단언하고 싶지 않다. 그 여파가 얼마나 될지 알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주정완 경제에디터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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