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20)-전 남노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제1부 독립을 위하여>
나는 중앙 고보에 와서 선생님들한테서는 주로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 민족정신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학생들로부터는 이와는 달리 신기한 새말을 많이 들었다.「노예교육」,「식민지통치」,「자본주의」,「착취」,「코민테른」등….
이런 말들은 진주 고보 에서는 전혀 들어본 일이 없었다. 나는 이런 말을 자랑삼아 잘 쓰는 학생에게 나의 무식을 부끄러워하면서 솔직히『나는 시골 놈이 되어 잘 모르니 좀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그들은 열변을 토하며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설명이 요령부득이라서 그런지, 내가 그 방면에 상식이 없어서인지 태반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조선이 독립하기 위한 민족주의 이외의 어떤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것 같은 감은 들었으나 그 내용은 안개 속에 싸인 것 같이 잘 알 수가 없었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그때 조선사람들에게『공산당은 제 애비를 죽이는 놈들이며 부자의 돈을 강탈하는 강도들』이라고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중앙 고보에 와서 민족주의의 선생들로부터 우리에게는 고래로부터 훌륭한 고유문화가 있었고 우리 선조 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며 조선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이야기 듣고서 우리는 민족주의로 독립해야 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서울운동장에 축구경기를 구경갔다가 종로5가 근처를 걸어오고 있었다. 뜻밖에 내 앞길을 어떤 신사가 막아 쳐다보니 얼굴이 잘 생긴 어른이었다.
『네가 갑동이 아니가? 나를 모르겠나? 』다정한 말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아 예! 하 선생님! 』나는 그를 알아보고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해 봄에 형수의 오빠 정동석이 나를 중앙 고보에 전학시켜 주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 그와 경남하동군 동향인 유명한 공산주의자 하형원의 집에 나를 데리고가 인사시켜준 일이 있었다. 그 당시 진주 근처 출신의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있었다.
조선 공산당 당수까지 지낸 진주의 강달영은 이미 죽고 없었지만 진주에는 강철·강병도 형제와 하동군에는 하필원·정희영이 있었고 우리 산청군에는 박낙종과 이지적(본명은 응규)등이 있었다. 이분들은 모두 다 봉건지주계급의 출신이었으나 민족해방의 방법으로서 보수적인 민족주의보다는 새 방법인 공산주의를 택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일본유학생 출신으로 일본에서 공산주의를 배워왔다.
하필원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안에는 그의(본처가 아닌) 강정애가 있었다. 그녀는 유명한 여자공산주의자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같이 시베리아로 이주했다가 거기서 공산주의자가 되어 국내에 잠입했다가 체포 돼 징역을 살고 나와서는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필원과 서울서 동거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로 나는 그녀의 경력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해 봄에 이 집에 와서 한번 만난 일이 있는 구면이어서 그녀도 나를 알아보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하필원·강정애, 그리고 나와 셋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하필원이 무슨 말끝에「노동자」를 들먹이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강정애가 갑자기『조선공산주의자는 틀려먹었어. 입만 떼면 노동자·농민·진보적 인텔리겐차 좋아하네. 여성 해방 없이 무슨 혁명이오?』하며 정색을 하고 남편에게 따져 드는 것이었다.
『조선공산주의자는 노동자·농민을 해방시키기 전에 자기 집의 여성, 자기가정을 먼저 해방시켜야해요. 조선인구 과반수 이상이 여성 아니에요? 노동자는 몇 명 되어요. 공장노동자는 20만도 못되는데. 1천만이 넘는 조선여성을 해방시켜 보세요. 조선민족 해방은 저절로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아요? 박 동무!』하며 그녀는 남편을 타박했다.
호인인 하필원은 내 앞에서 그렇게 타박을 받고도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어린 중학생인 나를 보고「박 동무!」라 하는데는 나는 정말 놀랐다.
나는 돌아가는 도중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 잡혔다. 강정애가 하필원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음을 짐작했다.
공산주의자라는 하필원이 본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강정애를 정식 부인으로 해주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 있으리라고도 생각되었다.
그러나 조선 인구 절반 이상의 여성을 가정의 종으로 그대로 두고는 조선 혁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나의 가슴을 강하게 잡아 흔들었다.
민족주의자가 몇 명이 되고 공산주의자가 몇 명이 되겠는가? 몇백 명 몇천 명의 선각자들로서 어떻게 독립을 할 수 있겠는가? 강정애와 같은 여자는 시베리아에서 싸우다가 눈보라치는 광막한 만주들판을 건너 삼엄한 국내의 경비망을 뚫고 들어와 싸우다가 체포되어도 초지를 굽히지 않고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하여 낙심하지 않고 꿋꿋이 살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새로운 눈이 뜨이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어떠한가? 우리 아버지도 이 민족의 식민지 탄압 밑에서 고민하고 계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모든 부담과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어머니와 형수에게다.
우리 형님은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면서도 자세한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만하고 형수에게는 하지 않았다. 여자도, 아내도 동등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같이 데리고 가야될 것 아닌가? 강정애의 말이 옳지 않은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