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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청와대 권력 수사, 잔인한 ‘학살 인사’에 흔들려선 안 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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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제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검찰 인사의 파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학살 인사’가 정치 쟁점으로 떠올랐다. 검찰 내부에서도 “정권의 뜻에 따르라는 메시지”라며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당장 우려되는 것은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과 감찰 무마 의혹 사건에 미칠 영향이다.

“총장이 명 거역”은 진실 가리는 궤변 #후속 인사로 수사 봉쇄는 국민이 심판

몇 번이고 되짚어 봐도 이번 인사는 잔인하고 참담한 복수극이다. 대검찰청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비리 수사와 울산 선거 의혹 수사를 각각 지휘했던 검사장들이 부산고검 차장, 제주지검장으로 전보됐다. 관련 수사를 이끌었던 서울중앙지검장은 수사와 먼 자리(법무연수원장)로 밀려났다. 반면에 신임 서울중앙지검장에 문재인 대통령의 대학 동문(이성윤)이 배치됐다. 검찰 간부 32명을 불과 반년 만에 물갈이함으로써 청와대 수사에 앙갚음하고 제동을 걸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모양새다.

더욱이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의 의견을 배제한 채 인사를 강행한 것은 법률 위반이다. 검찰청법이 법무부 장관의 검사 보직 제청에 대해 검찰총장의 의견을 듣도록 한 것은 협의를 거치라는 취지다. 그런데도 협의 절차를 형식화해 놓고 인사를 밀어붙인 것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봉쇄하겠다는 꼼수로 볼 수밖에 없다. “총장이 인사 의견을 내라는 장관의 명(命)을 거역했다”는 추 장관의 국회 법사위 답변은 진실을 가리는 궤변일 뿐이다. 미국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던 특별검사 해임을 법무장관에게 지시한 일로 사법방해 비판을 받다 사임해야 했다. 그토록 심각한 수사 방해를 막기는커녕 앞장서서 주도한 추 장관은 반드시 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어제 오후 이낙연 총리가 추 장관에게 “필요한 대응을 검토하고 실행하라”고 공개 지시한 것에선 집요함마저 느껴진다.

지금 청와대 수사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인사에 깔린 속셈대로 수사를 유야무야로 마무리짓는다면 검찰 조직은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간부들 얼굴이 바뀌었다고 해서 수사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검사들의 직업적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다. 지금까지 진행돼 온 대로 추호의 흔들림 없이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 지난해 울산시장 선거 과정에 청와대와 여당의 어떤 인물들이 개입했는지 그 면면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 감찰 무마 역시 불법적인 입김을 불어넣은 자들을 있는 그대로 가려내야 할 것이다. 윤 총장과 검찰 간부들은 거취를 표명하는 대신 그 결연한 각오로 수사를 끝까지 해내야 한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이제 더는 검찰 수사를 흔들려고 해선 안 된다. 후속 인사와 직제 개편을 통해 제2, 제3의 제동장치를 둘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후속 인사가 있더라도 청와대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담당 부장검사와 주임 검사는 인사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순리다. 지난해 문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서울중앙지검 등 직접수사 부서 폐지도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민주화 세력이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김준규 전 검찰총장)는 비판을 현 집권세력이 허투루 듣는다면 결국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