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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국민 위한 사법' 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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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치인은 "국민을 위하여"라는 말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입에 달고 있다. 여기서 정치인이 말하는 '국민'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에 관해 우리 모두가 깊이 음미해볼 때가 되었다.

현대 국가에서 국민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로 구성되어 있다. 여당 지지자도, 야당 지지자도 국민이다. 진보파도, 보수파도, 중도파도 국민이며 부유층도, 빈곤층도 국민이다.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모두 국민이다. 따라서 정치인이 말하는 국민의 개념은 구체성이 없고 모호한 것이며 진솔성이 희박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요즘은 시민단체에까지 이런 행태가 전이되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어 걱정스럽다. 어떤 시민단체들은 특정 이념을 전파하거나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후원하기 위한 정치활동에서조차 국민을 함부로 팔아먹고 있다. 각종 이익단체들도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가치가 절대적이라고 우기기 일쑤다. 그래서 때로 실정법보다 상위 개념 내지 가치라는 전제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관철하려 한다. 그 결과 다수 국민의 합의로 만들어진 법과 제도가 경시.무시되거나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사태가 왕왕 발생하고 있다.

사법부 쪽에서도 이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가 시작된 후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 '국민 중시의 사법부' '국민 대법관론'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과거 사법부 수뇌 교체 시기에는 없었던 용어이므로 일반의 오해가 없도록 그 뜻을 정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민을 위한 사법부'란 말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 그런 모호한 용어가 실정법의 연역.해석.적용을 통해 분쟁 당사자 간의 구체적 정의를 선언하는 법관들에게 사용하기에 적절한가도 문제다.

헌법은 절대 다수 국민의 합의에 의해 국가의 목표와 기본적 가치를 담은 국가의 최고 기본법이다. 국회에서 만드는 법률은 헌법의 정신과 내용을 구체화한 틀이며, 행정부의 정부 운영은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구체적 가치(국익)를 집행하고 실현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데 국가 경영에서 무엇이 헌법이 규정한 최고의 가치인지, 정부의 정책이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것은 아닌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 국민 상호 간에도 자기 주장이 옳다고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경우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을 유권적.배타적으로 해석해 어느 것이 헌법과 법률이 규정하는 국익(가치)이며 구체적 정의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사법부의 이 같은 유권적.배타적 권한은 일반 국민은 물론 법을 만든 국회도, 국가 원수 겸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도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국가의 최고 가치판단 권능(權能)인 것이다. 이때 법관은 국민의 뜻과 국익을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서만 찾아야 한다. 헌법과 법률의 규정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미 합의된 국민의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압력, 특정 사회집단(특히 목소리 큰 시민단체)의 목소리, 전관예우와 같은 친소 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러한 사법권의 운영이야말로 이미 합의된 국가의 최고가치(국익)를 지키고 실현하는 것이며, 합의된 국민의 뜻에 따른 '국민을 위한 사법 운영'인 것이다. 이 점에서 법관은 정치인이나 행정관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권이든 시민단체든 자기들의 코드에 맞는 재판을 요구하면서 '국민을 위한 재판'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자기 주장의 명분을 덧칠하는 것은 헌법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국민을 위한 재판'을 방해하는 행동이다. 법원도 '국민을 위한 사법'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다면 이런 시류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우려가 있으므로 용어의 사용에 극히 신중해야 한다.

김인섭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대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