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년 옥살이 했는데…‘화성8차’ 고문경찰 처벌 못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당시 수사 과정에서, 범인으로 지목됐던 윤모(오른쪽)씨에 대한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경찰 수사관들의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다. [중앙포토·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당시 수사 과정에서, 범인으로 지목됐던 윤모(오른쪽)씨에 대한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경찰 수사관들의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다. [중앙포토·연합뉴스]

"사흘 동안 잠도 안 재우고 조사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게 아니다'라고 하니 주먹으로 맞고 발로 차였다."

'8차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돼 20년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윤모(52)씨가 지난 10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윤씨는 당시 "쓰러진 뒤에도 (경찰한테) 뺨을 맞았고, 다리가 불편한데 쪼그려뛰기도 시켰다"며 "형사가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겁을 줘서 자백했다. 거기(경찰서)서 죽어 나간들 신경도 안 쓰는 시대였다"고 말했다.

최근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검찰과 경찰도 당시 수사 경찰로부터 고문 및 가혹행위 등의 정황에 대한 진술을 확보했다. 윤씨가 경찰의 강압수사 등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해 ‘억울한 옥살이’를 했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강압수사를 벌인 경찰에 대해 형사 처벌 가능성은 있을까. 법조계의 시각은 회의적이다.

'화성 8차' 불법체포·강압수사 정황

화성 8차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화성 8차 사건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8차 화성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의 한 가정집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범인으로 지목된 윤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하다 2009년 가석방됐다. 윤씨는 재판에서 "경찰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련의 화성 사건 진범으로 밝혀진 이춘재가 "8차 화성 사건도 내가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윤씨의 주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재심 청구에 따라 사건 발생 30년이 지나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검경도 당시 수사 경찰들로부터 고문 정황에 대한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법조계 등에 따르면 당시 수사 경찰들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윤씨에 대한 고문 등 가혹행위 정황을 인정하면서도 "숨진 장모 형사가 저지른 일"이라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장 형사가) 윤씨를 2~3시간 밖에 데리고 나갔다가 오더니 자백하더라" "쪼그려 뛰기 시키는 것을 봤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한다.

윤씨 측은 당시 경찰이 불법체포 및 감금을 했다는 주장도 한다. 윤씨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는 최근 검찰에 제출한 의견서에 "(수사기록엔) 경찰이 윤씨를 임의동행한 것으로 기재돼 있지만 기록 어디에도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동행이 이뤄졌다'는 점을 증명할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며 경찰의 불법체포 및 감금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윤씨는 "체포됐을 때는 회사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경찰이 갑자기 와서 잡아갔다"며 "지서(당시 파출소를 부르던 말)로 잠깐 들렀다가 야산으로 데리고 가더라"고 말했다. 이어 "깜깜한 가운데 형사들과 봉고차를 타고 올라갔고, 거기서 형사가 몇 마디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다시 경찰서로 가서 사흘 내내 조사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처벌 사실상 불가능"

윤씨의 구속을 알리며 '화성 사건 미궁에서 벗어나려나'를 기대한 1989년 7월 29일자 중앙일보 기사.

윤씨의 구속을 알리며 '화성 사건 미궁에서 벗어나려나'를 기대한 1989년 7월 29일자 중앙일보 기사.

당시 경찰의 강압수사 가능성이 점차 구체화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형사처벌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모두 공소시효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경찰의 불법체포 및 불법구금은 7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할 수 있는 범죄다. 또 경찰이 폭행 또는 가혹행위를 한 이른바 '독직폭행'의 경우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선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범죄의 경우 공소시효는 7년이다. 2007년 법 개정 전의 공소시효는 5년이다. 30년 전에 이뤄진 당시 경찰의 불법 행위에 대한 형사 처벌은 현행법상 불가능하다.

검경의 판단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에 대한 행정처분 등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16일 민갑룡 경찰청장은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문제가 있다면 (특진 취소) 검토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관 5명은 1계급 특진했다. 형사 등 3명은 순경에서 경장이 됐고, 2명은 경장에서 경사로 특진했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