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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늘리는 건 쉬웠고 줄이는 건 어려웠다…‘게임의 룰’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도 선거법만큼은 여야 합의로 개정하는 전통을 지켰다.”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관련법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을 두고 일어난 여·야 간 충돌 직후인 지난 4월 28일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30여년 정치권에 몸담아 온 여권 인사는 최근 중앙일보와 만난 자리에서 “모르는 소리”라며 “선거법은 합의 처리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87년 체제에서 치러진 8번 총선에서 적용된 선거법을 종합 검토하면 둘 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6번은 여야 합의처리였다. 하지만 1988년 13대 총선을 위한 선거법은 여당(민주정의당) 주도로 강행 처리했고, 2000년 16대 총선 선거법은 표 대결이었다. 8번 중 6번은 선거 직전인 2월(16·18·19대)과 3월(13·17·20대)에야 처리됐다. 진통을 겪었다는 의미다.

대체로 지역구 의석을 늘릴 때는 큰 불협화음 없었다. 어떤 변수들이 충돌과 타협의 조건이었을까.

현장풀)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가 12일 국회 의장실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과 사법개혁 법안, 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 등 정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동을 갖고 있다. 왼쪽부터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 의장, 나경원 자유한국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임현동 기자

현장풀) 문희상 국회의장과 여야 3당 교섭단체 원내대표가 12일 국회 의장실에서 내년도 정부 예산안과 사법개혁 법안, 선거법 개정안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 등 정국 현안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회동을 갖고 있다. 왼쪽부터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문 의장, 나경원 자유한국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임현동 기자

표 대결로 간 2000년 구조조정

1988년은 앞서 쓴 대로 강행처리 모양새였다. 하지만 가장 큰 쟁점인 DJ(김대중)의 소선거구제(선거구에서 한 명 선출) 요구를 여당인 민정당은 물론 YS(김영삼)도 수용한 상태였다. ‘양해된 강행처리’였다는 의미다.

그때 빼곤 가장 갈등이 심했던 해는 의원정수 감축이 화두였던 2000년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9년 2월 당시 여당이던 정균환 새정치국민회의 원내총무가 “사회 각 분야가 고통 분담과 구조조정을 진행했지만 유독 정치권만은 무풍지대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여당은 299명이던 의원 정수를 250명까지 줄이자고 했다.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은 “정부 주도의 고강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했고 그 결과 실업자가 양산되던 상황에서 청와대와 정부도 고통 분담 차원의 다운사이징을 할 때였다”며 “DJ가 직접 개입하진 않았지만 여당 입장에서 의원 수 감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곧이어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공동 여당이었던 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270명으로 낮춘 선거법 개정안을 내놨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의원 수를 줄이는 것을 개혁이라고 보는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11월 23일 기자간담회)고 맞섰다. 결국 의원 정수 감축의 키는 선거구획정위원회(이하 획정위)로 넘어갔다. 2000년 1월 지역구 26개(273석)를 줄이자는 획정위의 제안을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수용했고 2월 8일 본회의에서 표 대결이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16석을 줄이는 수정안을 냈지만 부결됐다. 국민회의의 ‘1인 2표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자민련이 한나라당 편에 서면서 막혔다.

국회의원 의석수 변화. 그래픽=신재민 기자

국회의원 의석수 변화. 그래픽=신재민 기자

탄핵 정국서도 지역구 증가엔 합의한 2004년

2001년 헌법재판소가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에게 던진 표를 곧 정당 지지로 간주하는 비례대표 산정방식(1인1표제)에 대해 한정 위헌, 인구 최다 선거구와 최소 선거구 간 편차가 3 대 1을 넘는 선거구 획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표의 민주성·등가성' 문제다. 대대적인 선거구 조정이 불가피해 보였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대선자금 수사(2003~2004년) 이후 ‘정치개혁’ 차원에서 논의된 지구당 폐지 등의 ‘오세훈법(정당법·정치자금법·선거법 개정안)’도 걸려있었다.

하지만 논쟁은 의외로 '쉽게' 풀렸는데 2004년 3월 2일 자 속기록에 그런 정황이 드러나 있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정개특위 간사였던 천정배 의원이 “지역구는 243석, 그리고 전국구 56석, 총 299인으로 하기로 했다”고 제안하자 여야 의원들은 반발 없이 이 안을 통과시켰다. “지금까지 의원 정수 동결하는 방침을 세우고 정개특위를 운영해 오다가 사실상 16대 국회 마지막인 오늘 슬그머니 정수를 299명으로 늘렸다는 것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대단히 클 것”이라는 심규철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의원 정수를 16대 국회 이전으로 돌리는 선거법 개정안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던 3월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6대 의원을 지낸 한 여권 인사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지만 외환위기도 극복된 마당에 의원 정수를 회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2008년 17대 총선 무렵부터 나왔던 ‘의원정수 300명’ 주장은 2012년에 입법화됐다. 신설 지역구 세종에서 1석을 늘린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다. 헌재의 결정으로 인구 편차를 2 대 1로 맞춰야 했던 2016년에는 300석은 유지하되, 지역구를 7석 늘리고 비례대표를 그만큼 줄여 문제를 해결했다.

선거법 자동 부의…긴장감 고조 

1985년 민추협 공동의장 시절의 김대중ㆍ김영삼

1985년 민추협 공동의장 시절의 김대중ㆍ김영삼

패스트트랙에 오른 선거법 개정안은 27일 0시를 기점으로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다. 언제든 상정해 표결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접어든 것이다. 자유한국당과는 고사하고 지난 4월 패스트트랙에 합의했던 민주당과 야4당(바른미래당·대안신당·정의당·민주평화당)간의 협상도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한 상황이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 관건적인 문제”라며 “(패스트트랙에 오른) 225(지역구)-75(비례대표) 안은 논의의 출발점이지 종결점은 아니다”라는 원론을 반복했다.
현재로선 극적 타결 가능성보단 미처리에 따른 현행 선거법 유지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바른미래당 소속의 한 의원은 “대안신당과평화당은 지역구 감축엔 결사 반대고 정의당은 비례대표 수의 유의미한 증가를 원한다”며 “의원 정수 확대 없이 군소 4당의 희망 사항을 조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문제"라고 말했다. 국회는 지금껏 의원 정수 확대 없이 비례대표를 늘려본 경험이 없다.
최준영 인하대 교수는 "과거에 비하면 사회의 진영 간 대결, 이념적 분열의 골이 훨씬 깊어져 합의가 어려워진 상황인데 공수처 문제까지 연동돼 타협이 더 어렵게 됐다"며 "정치적 보스들이 사라지고 정치과정이 투명해진 것도 어쩌면 타협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임장혁·하준호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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