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국방부와 합참이 있는 삼각지에선 각종 행사가 이어진다. 행사 초청장엔 ‘현역·예비역 군인은 정복(공식 행사용 군복), 민간인은 정장’이란 문구가 반드시 들어 있다.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민간인은 예비역이 아니면 군복을 입을 수 없다. 전 세계 공통 드레스 코드(복장 규정)다.
규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간인이 함부로 군복을 착용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군복은 군의 전통과 군인의 상징이 담긴 의복이라서다. 같은 군복의 사람을 전우라 부른다. 전쟁터에서 내가 전우를 위해 죽을 수 있고, 전우는 나를 구하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관계다.
김진형 예비역 해군 제독은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에서 “군복은 군인이 마지막 순간에 입고 떠나는 그들의 수의(壽衣)와 다를 바 없다”며 “군복이야말로 군인들만이 입는 고귀한 옷”이라고 썼다. 그는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산화한 46명 장병 중 시신을 찾은 40명을 입관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한 명 한 명에게 군복을 입히면서 “이것이 자네 수의이고, 이 옷이 성의(聖衣)라네…”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눈물을 쏟았다.
그런데 지난 12일 육군 제30기계화보병사단에서 군복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민간인인 우오현 SM그룹 회장이 명예 사단장 자격으로 전투복 차림에 별 2개가 박힌 베레모를 썼다. 장병의 경례를 받고, 표창장을 주고, 훈시를 했다. 또 30사단장과 함께 오픈카를 타고 부대를 사열했다.
30사단 측은 장관·합참의장급 오픈카를 국방부에서 빌렸는데, 이는 우 회장이 문재인 정부에서 ‘잘 나가는 기업인’으로 꼽히기 때문일 게다. 군심(軍心)이 들끓었다. 전역을 앞둔 장성이 최근 소회를 남겼다. “선배들이 ‘전역하면 무거운 갑옷을 벗는다’고 했는데, 그 뜻을 알 것 같다. 그동안 국가와 군만 생각했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갔다. 이제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후련하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군복의 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일까.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