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군복의 무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연말연시 국방부와 합참이 있는 삼각지에선 각종 행사가 이어진다. 행사 초청장엔 ‘현역·예비역 군인은 정복(공식 행사용 군복), 민간인은 정장’이란 문구가 반드시 들어 있다. 지위가 아무리 높더라도, 민간인은 예비역이 아니면 군복을 입을 수 없다. 전 세계 공통 드레스 코드(복장 규정)다.

규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간인이 함부로 군복을 착용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다. 군복은 군의 전통과 군인의 상징이 담긴 의복이라서다. 같은 군복의 사람을 전우라 부른다. 전쟁터에서 내가 전우를 위해 죽을 수 있고, 전우는 나를 구하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관계다.

김진형 예비역 해군 제독은 『대한민국 군대를 말한다』에서 “군복은 군인이 마지막 순간에 입고 떠나는 그들의 수의(壽衣)와 다를 바 없다”며 “군복이야말로 군인들만이 입는 고귀한 옷”이라고 썼다. 그는 2010년 천안함 폭침으로 산화한 46명 장병 중 시신을 찾은 40명을 입관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한 명 한 명에게 군복을 입히면서 “이것이 자네 수의이고, 이 옷이 성의(聖衣)라네…”라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눈물을 쏟았다.

그런데 지난 12일 육군 제30기계화보병사단에서 군복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민간인인 우오현 SM그룹 회장이 명예 사단장 자격으로 전투복 차림에 별 2개가 박힌 베레모를 썼다. 장병의 경례를 받고, 표창장을 주고, 훈시를 했다. 또 30사단장과 함께 오픈카를 타고 부대를 사열했다.

30사단 측은 장관·합참의장급 오픈카를 국방부에서 빌렸는데, 이는 우 회장이 문재인 정부에서 ‘잘 나가는 기업인’으로 꼽히기 때문일 게다. 군심(軍心)이 들끓었다. 전역을 앞둔 장성이 최근 소회를 남겼다. “선배들이 ‘전역하면 무거운 갑옷을 벗는다’고 했는데, 그 뜻을 알 것 같다. 그동안 국가와 군만 생각했다.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 갔다. 이제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됐다. 후련하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군복의 무게가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일까.

이철재 국제외교안보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