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려는 노조원에게 일감 안 주겠다고 협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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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지역 건설노조원들의 포스코 본사 점거 농성이 21일 노조원들의 자진 해산으로 8일 만에 끝났다. 노조원이 물러난 포스코 사무실은 난장판으로 변했다. 경찰과 대치했던 4층과 5층 연결계단은 돌과 유리조각 등이 널려 있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사진위). 경찰 진입을 막기 위해 LP가스통으로 만든 사제 화염방사기가 한 사무실에 놓여 있다(가운데). 장애물로 사용한 소화기와 책걸상이 쌓여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다음 주말께나 본사 건물에서 정상업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노조의 파업과 농성으로 최소 1200억원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했다. 포항=조문규 기자

"일부 과격 노조원들이 경찰에 사제 화염방사기를 발사할 때는 대형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 너무 두려웠습니다. '나가자'는 사람과 '버티자'는 사람이 옥신각신하고…. 정말 갈등이 심했어요."

8일 만에 포스코 본사 농성장을 빠져나온 포항지역 건설노조원 박상호(57.가명.사진)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농성장에 남아 있다 21일 오전 3시쯤 빠져나왔다.

박씨는 시간이 흐르면서 농성에 지친 노조원과 노조지도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노조원들 사이에선 "명분 없는 농성 아니냐"는 얘기도 많이 나왔다. 나이 든 사람들이 "나가자"고 하면 지도부 쪽 젊은 사람들이 "잘못 보이면 일감을 주지 않겠다"며 이탈을 막아 말다툼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한때는 환자들까지 나가지 못하게 했다. 농성장에서 대부분의 노조원은'노.노 갈등'에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얘기다.

박씨는 건물을 점거한다는 사실도 몰랐었다. 13일 오전 8시30분 '긴급사항, 포스코 정문 앞으로'라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해 보니 2000여 명의 노조원이 본사 정문 앞에 모여 있었다. 노조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그도 동료와 함께 건물 1, 2층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저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위해 잠시 들어간 것으로 생각했지요."

이튿날 경찰이 투입돼 본사 건물을 에워쌌다. 박씨는 "겁이 더럭 났다"고 말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라"는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11층으로 갔다. 그는 이날 복통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배가 아프다며 보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혼자 내려가면 경찰에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대로 참았지요."

라면과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설사가 시작됐다. 잠자리를 아예 화장실 문 앞으로 정했다. 라면 박스를 깔고 누워 잠을 청했지만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7일째인 19일 다시 노조 간부에게 복통을 호소하며 보내 달라고 했지만 "기다려라"는 말만 돌아왔다. 견디다 못해 환풍구와 엘리베이터 통로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18일 전기가 끊겼다. 정부가 강경대응 방침을 밝힌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안감이 더 커졌다. 박씨는 "젊은이들은 환풍구로 빠져나갈 수 있지만 나이 든 사람은 추락 우려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포항 시민들도 건설노조의 명분 없는 농성을 비난한다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경파와 온건파, 젊은층과 노년층의 의견이 충돌하는 등 노조의 결속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농성 마지막까지 노조 간부들은 "조금만 더 참아보자"며 노조원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지금 나오면 별다른 조치 없이 귀가시키겠다'는 경찰의 거듭된 해산 방송에 지도부의 목소리는 묻혀 버렸다. 박씨는 21일 새벽 잠결에 "가자, 가자"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동료들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30년 가까이 건설 현장에서 일했지만 노조가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다는 박씨는 "지난 며칠 동안 지도부에 배신당한 느낌"이라며 "지금 생각하니 우리 잘못으로 세계적인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아 괴롭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포항=홍권삼 기자<honggs@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박씨 사진을 본인의 요청으로 모자이크 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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