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은 미국서 이단자 노릇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파리=배명복 특파원】『이단아 옐친, 그는 과연 형편없는 술주정뱅이에다 자본주의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쇼핑 광인가』
요즘 모스크바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며 동시에 걱정거리는 바로 최근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보리스 옐친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전 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 에 관한 것이라고 서방언론들은 전한다.
지난 3월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선거에서 공산당을 맹렬하게 비난, 압도적 표 차로 당선된 급진적 개혁주의자 옐친. 모스크바시민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그가 자본주의 대국미국을 돌아다니며「정말」하루에도 위스키를 몇 명씩이나 마셔 대고, 쇼핑에 정신이 팔려 돈을 물쓰듯했는지 모스크바시민들은 당혹스럽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다시 모스크바에 돌아온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다.
옐친을 둘러싼 이같은 의혹은 그가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지난 14일 그의 미국행각을 다룬 한 이탈리아 일간신문의 특집기사가 소련공산당기관지인 프라우다 지에 전문 번역돼 게재된 데서 비롯됐다.
이탈리아 라레퍼블리카 지의 워싱턴특파원이 쓴 이 기사에 의하면 옐친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에다 위선자로 되어 있다.
그가 당초 소련AIDS재단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한 미국강연료수입(약 2만5천 달러)을 비디오 기기 2대에다『람보』·『ET』·『스타워스』같은 비디오테이프, 새 양복에 새 구두, 새 와이셔츠 등을 사는데 몽땅 써 버렸다는 것.
이 신문은 또 옐친이 미국에서 5천km에 걸쳐 각지를 순방한 닷새동안 잭 다니엘(위스키) 4병에다 보드카 2병을 마셨다면서 이것도 모자라 공식 리셉션자리 때마다『자유를 위해 건배』를 외치며 셀 수도 없이 많은 칵테일 잔을 비웠다고 보도했다.
결국『옐친에 있어 미국이란 즐거운 휴일의 쇼 무대이자 길이 5천km의 술집』이었으며 『미국에 있어 옐친은 신기한 새 장난감이자 그 이전에 어떤 소련인도 말하지 않던 것을 말해 주는 전형적인 러시아인 얼굴을 한 인형』이었다고 이 기사는 단정한다.
이러한 옐친은 그가 80년대의 소련역사를 폭풍노도처럼 휘저었던 그대로 이번에는 미국의 백화점을 휩쓸었다는 것이다.
지난 18일 미국에서 돌아온 옐친은 서둘러 그 같은 보도는 1백% 거짓에다 모함이며, 미국에서 환대 받은 자신에 대한 보복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번 경우 그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서방언론들의 진단이다.
지금까지 소련관영언론들이 그를 비난하고 나설 때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의 인기가 더욱 높아졌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래도 서방언론의 보도내용이 번역 게재된 경우 기 때문에 그 사정이 과거와는 다르다.
옐친 지지자들은 그의 방미와 관련된 서방의 긍정적인 기사도 많았을 텐데 하필 이 기사만을 전문 게재한 프라우다 지의 불순한 의도를 공격하면서도 서방언론이 옐친에 대해 그런 식의 공격적 기사를 실었다는 사실에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하겠다는 반응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일부 열렬한 지지자들은『이탈리아신문기자가 스스로 그런 류의 모함에 가득 찬 기사를 썼을 리가 없다』면서『틀림없이 소련공산당의 매수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격분하고 있다.
서방언론들은 모스크바시민들의 대체적 관심이 옐친의 방미행각에 대한 진위여부보다는 자신들의 우상을 또 다시 당국이 공격했다는데 모아지고 있다면서『소련국민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상징을 필요로 하고있다』는 지지자들의 말을 인용, 보도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