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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깊이읽기] '거짓을 과학으로 포장' 정보 조작의 흑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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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거짓 나침반
원제:Trust us, we're experts!
샐던 램튼·존 스토버 지음, 정병선 옮김
시울, 511쪽, 1만8000원

1999년 어느 날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에 미국 경제학자 240명 이름으로 된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라는 전면 광고가 나갔다. "법무부가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손보려고 하는데 이는 소비자가 아닌 경쟁 업체에만 이익이 될 뿐"이라며 이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10만 달러가 넘는 광고비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독립연구소라는 이름의 비영리 싱크탱크가 지급했다. 얼마 뒤 컴퓨터업계 잡지인 뉴스바이츠는 "이 연구소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운영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받아왔다"고 폭로하고 경제학자들의 공개서한도 '기획 홍보'일 뿐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폭로도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어떤 회사의 기획 홍보라고 한다.

이 책은 이렇듯 전문가를 앞세운 기업들의 '믿어주세요'식 홍보 전략에 의해 대중 또는 소비자의 눈과 귀가 철저히 막혀 있다고 주장한다. 구린 데가 있는 업계가 전문가를 활용하는 고도의 홍보 기법으로 사실을 덮으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미국 시민운동단체인 '미디어 민주주의 센터' 소속의 지은이들은 다양한 사례를 제시해 이 주장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사례 가운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권위 있는 과학.의학 전문잡지의 활용이다. 90년대 초 미국 담배업계는 유력 의학지에 담배의 무해성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는 대가로 과학자들에게 15만6000달러를 비밀리에 지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권위 있는 의학전문잡지인 뉴잉글랜드의학 저널은 86년 항생제 아목시실린의 효과에 대한 상반된 결론의 두 논문이 동시에 들어오자 긍정적인 것만 실었다가 문제가 됐다.

업계가 연구비를 지원해 자신에 유리한 결과를 얻는 일은 이미 고전적인 기법이 됐다. 60년 석면 주제 논문이 63편이 발표됐는데 석면업계의 지원을 받은 11편은 석면이 폐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한결같이 부인했지만 다른 논문 52편의 결론은 모두 이와 정반대였다.

이 책이 주는 충격의 하나는 '쓰레기 과학'이라는 이름의 적반하장이다. 90년대 담배업계가 전문가들을 동원해 담배의 발암성을 문제 삼는 이들을 '쓰레기 과학' 숭배자라고 공격한 게 기원이다.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은 90년대 환경오염이 암의 원인이라고 강조한 책이 나오자 이를 '망상에 불과한 쓰레기 과학 숭배'라고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이를 투고한 '의학박사이자 공중보건 전문가'는 알고 보니 오염으로 인한 암 유발로 소송을 당한 화학기업의 독성학 책임자였다.

더 큰 문제는 업계의 돈을 받은 이른바 전문가들이 건전과학을 알려주겠다며 방송 출연, 강연회, 기고 등을 이용해 대중을 호도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을지. 어느 것이 맨얼굴이고, 어떤 것이 진실의 가면을 쓴 거짓인지 구분하기가 갈수록 어려운 시대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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