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저주 담긴 댓글이 한국 공론장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런던 주택가 도로에서 몇 달간 공사가 이어졌다. 막히던 구간이라 공사 후 차량 흐름이 빨라질까 기대했다. 며칠 전 지나다 깜짝 놀랐다. 차로 하나를 없애고 인도를 넓혀 놓았기 때문이다. 학교 주변이라 안전을 고려한 조치로 보였지만, 차로를 인도로 바꾼 영국의 판단은 낯설었다.

도로 공사 얘기를 꺼낸 것은 한국의 폭주하는 인터넷 문화 때문이다. 정보통신 강국 한국에선 대다수가 포털사이트에서 뉴스를 보고 댓글을 단다. 포털은 댓글이 많은 뉴스, 실시간 검색어를 순위별로 노출한다. 유럽에는 한국 포털 같은 디지털 플랫폼 자체가 없다. 구글이 뉴스를 소개하지만 해당 언론사로 연결될 뿐이다. 언론사 사이트에서 댓글을 달 수 있는데, 실명 로그인이 필요하다.

댓글이 국민 의견의 일단을 보여주지만, 도를 넘었다. 악플을 견디다 못한 유명인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국 논란’ 와중에는 실시간 검색어와 특정 성향 댓글을 상위에 올리려는 경쟁까지 벌어졌다. 특히 욕설 등 저급한 표현을 쓰며 감정의 쓰레기를 던져놓은 것 같은 댓글이 문제다.

국회 교육위 회의에서 한 의원이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관련 댓글을 보고 있다. [뉴스1]

국회 교육위 회의에서 한 의원이 당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관련 댓글을 보고 있다. [뉴스1]

공론의 장으로 역할하던 주체들은 무너지고 있다. 여야 정치권은 공방전을 벌이느라 어느 한쪽 의견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국회가 여론의 용광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다양한 입장을 소개해 온 언론도 여론에 미치는 영향과 조율 기능이 급격히 떨어졌다. 시민사회나 학계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 조국 지지와 반대 등으로 갈린 진영 논리는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과 정치권, 언론, 지식인 모두를 저주의 대상으로 몰아넣었다. 이 균열의 틈새를 댓글이 메웠다.

표현의 자유라 할지 모르지만 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제재를 도입했다. 다수를 규제할 수 없으니 플랫폼 제공 기업에 책임을 지운다. 독일은 혐오 발언이나 가짜 뉴스를 방치하는 소셜미디어 기업에 최고 600억원가량을 물리는 법안을 지난해 초 시행했다. 그러자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문제 게시물을 삭제했다. 한국 포털 기업도 댓글 경쟁으로 유입된 이들 덕분에 돈을 벌 테니 책임도 져야 한다. 댓글을 운영하는 언론사도 마찬가지다.

영국은 1986년 공공질서법을 만들었는데, 무슨 내용이건 집 등에서 자기들끼리 표현하면 괜찮다. 하지만 위협을 주거나 모욕적인 내용을 게시하면 처벌한다. 인종이나 종교적 차별은 최장 2년 징역형이다. 극렬 지지층이 필요해 정치권이 대안 마련에 소극적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거꾸로 갈 때다. 차로를 줄인 영국처럼.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