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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태극기 사라진 개천절 "애국심 실종" vs "꼰대적 발상"

중앙일보

입력

개천절인 3일 대전 유성구 도안신도시 한 아파트 단지. 수백 세대 중 태극기를 단 집은 한 곳뿐이다. 김방현 기자.

개천절인 3일 대전 유성구 도안신도시 한 아파트 단지. 수백 세대 중 태극기를 단 집은 한 곳뿐이다. 김방현 기자.

개천절인 3일 오전 대전 유성구 도안신도시 한 아파트 단지. 수백 세대 중 태극기를 단 집은 한 곳뿐이었다. 회사원 김남수(52·대전 유성구)씨는 "국경일인데도 태극기 달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명색이 우리 민족 생일 아니냐. (사람들이) 입으로만 애국한다"고 말했다.

대전·전북 등 아파트 단지 둘러보니 #국경일인데도 태극기 단 곳 드물어 #"입으로만 애국한다"는 지적 나와 #"태극기 단다고 애국이냐" 반박도 #태풍 '미타' 영향? 태풍주의보 해제 #이인철 "대한민국 일원 표현하는 방법" #"태극기를 정치 도구 만드는 건 잘못"

비슷한 시각 전북 전주시 효자동 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사정은 비슷했다. 총 10개 동, 800여 세대가 사는 이 아파트에 태극기를 단 가구는 10곳 안팎이었다. 관공서를 제외하고는 태극기를 단 곳이 드물었다. 주택가에서도 국경일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태극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거리마다 'NO 일본' 현수막이 빼곡히 걸린 모습과 대비됐다.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르면 3·1절과 현충일·제헌절·광복절·국군의날·개천절·한글날 등 국경일로 지정된 날에는 태극기를 게양해야 한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다 보니 국경일을 앞두고 정부와 자치단체 등에서 태극기 달기 운동을 독려해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개천절인 3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한 아파트 단지. 국경일인데도 태극기가 걸린 집이 없다. 김준희 기자

개천절인 3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한 아파트 단지. 국경일인데도 태극기가 걸린 집이 없다. 김준희 기자

"국경일마다 태극기를 건다"는 김모(72·전주 송천동)씨는 "국경일에 집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은 옛날 얘기"라며 "요즘은 평일에 하루 덤으로 쉬는 날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반면 직장인 박모(40·여·전주 효자동)씨는 "국경일에 태극기를 단다고 애국심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며 "다른 방법으로도 나라를 위할 수 있는데 태극기 게양 여부로 애국심을 따지는 것은 '꼰대' 같은 발상"이라고 했다.

올해 개천절에 태극기가 실종된 배경에는 제18호 태풍 '미타'의 영향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한민국국기법에도 "국기가 심한 눈·비와 바람 등으로 그 훼손이 우려되는 경우에는 이를 게양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주기상지청에 따르면 전북 지역에 내려진 태풍주의보는 이날 오전 4시를 기해 모두 해제됐다. 전북도 재해대책본부는 "태풍 '미탁'에 따른 피해는 접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태극기 훼손이 우려되는 날씨는 아닌 셈이다.

개천절인 3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북도청 청사 앞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 김준희 기자

개천절인 3일 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북도청 청사 앞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 김준희 기자

향토사학자인 이인철(92) 체육발전연구원장은 "개천절에 태극기를 다는 건 개천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가 대한민국 일원임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만든 날을 영구히 잊지 않겠다는 것을 말로 할 수 없으니 태극기로 표현하고 태극기 달기 운동을 하는 건데 점점 그 의미가 희석되고 있다. 이런 정신이 없으면 국가도 없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태극기를 달지 않는 풍토에 대해 이 원장은 "태극기를 두고 한쪽에서 좌우 이념이나 정체성 싸움이 벌어진 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태극기 부대'라는 것도 태극기의 가치를 극소화하고 정치 도구로 삼는 것"이라며 "태극기를 특정 정치 세력의 상징물로 만드는 것은 잘못됐다"고 덧붙였다.

대전·전주=김방현·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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