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종이, 비누로? 현대미술 실험실에 낸 한국 작가들의 도전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정두화작 '사운드'. 나무 판 위에 책 종이를 가늘게 말아 세워 만들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런던 사치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정두화작 '사운드'. 나무 판 위에 책 종이를 가늘게 말아 세워 만들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영국 런던 부촌 첼시에 있는 사치갤러리. ‘코리안 아이 2020 : 한국 동시대 미술’(Korean Eye 2020 : Contemporary Korean Art) 전시관에 들어서자 작은 점들로 이뤄진 원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한 작품이 눈에 띈다. 다가가자 점은 종이를 둘둘 말아 세워놓은 것이었다. 종이에 한글 글씨가 깨알 같이 담겼다. 스피커 모습을 형상화한 정두화의 작품 ‘사운드'.

내년 에르미타시 박물관 등 전시 앞두고 #데미언 허스트 배출 런던 사치갤러리 전시 #"다른 나라 작가들 안 쓰는 재료 사용, #전통 다루면서 다른 세계로 나아가" 호평 #

 “한국 예술가들은 보통 다른 나라 작가들이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씁니다. 사운드 작품은 자선단체서 구한 책의 종이를 이용해 만든 거에요. 천재적이지 않아요?” 10년 전 한국을 방문했다가 ‘코리안 아이’ 전시를 시작한 슈퍼컬렉터 세레넬라 시클리티라 PCA(Parallel Contemporary Art) 대표의 말이다.

독일 간호사 출신 한국인 어머니와 스페인 출신 아버지를 둔 헬레나 파라다 김이 자신의 작품 '해와 달' 앞에 서 있다. 한국에서 본 리어커를 끄는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독일 간호사 출신 한국인 어머니와 스페인 출신 아버지를 둔 헬레나 파라다 김이 자신의 작품 '해와 달' 앞에 서 있다. 한국에서 본 리어커를 끄는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그와 남편 데이비드는 한국 미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해외 소개를 시작했다. 2009년 ‘코리안 아이 : 문(moon) 제너레이션’을 필두로 2011년까지 영국과 미국 등에서 한국 현대미술 작가전을 세 차례 열었다. 첫 전시 10주년을 맞아 준비한 네 번째 전시에 한국 작가 30명을 초대한다. 내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시 박물관과 사치갤러리, 서울에서 선보인다. 이를 앞두고 24일(현지시간)부터 29일까지 일부 참여 작가의 작품이 사치에서 관람객과 만나고 있다.

 사치갤러리는 데미언 허스트 등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젊은 예술가를 발굴해온 미술품 수집가 찰스 사치가 1985년 개관했다. 200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 갤러리에서 제품을 전시하는 것 자체만으로 명성이 올라가고 작품값이 뛰곤 한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 현지 언론인들과 미술계 관계자들. 런던=김성탁 특파원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 현지 언론인들과 미술계 관계자들. 런던=김성탁 특파원

 코리안 아이 작가 선정을 주도한 세레넬라 대표는 “첫 전시를 시작하던 10년 전 한국 미술은 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예술은 설명이 필요 없고 그냥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면 되는데, 뉴욕ㆍ런던ㆍ싱가포르 등에 소개하면서 한국 미술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이 반향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예술은 자신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세계로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게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도자기처럼 생긴 작품은 신미경 작가가 비누로 만든 것이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도자기처럼 생긴 작품은 신미경 작가가 비누로 만든 것이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사치갤러리에서 신미경 작가는 도자기 모양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재료가 비누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투명한 유리처럼 보인다. 20여년간 런던을 무대로 비누로 작업 중인 신 작가는 서양의 대리석 조각을 보고 비누 같다고 생각해 재료로 택했다. 그는 “비누로 만든 불상을 공공화장실에 놓아 사람들이 사용하게 하면서 존재와 부존재 사이에 놓인 재료의 특성을 살리곤 했다"고 소개했다.

 그가 진출할 당시만 해도 존재감이 없던 한국 미술은 현재 유럽에서 개념이 있고 굉장히 활발하며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신 작가는 전했다.

사치갤러리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박은하 주영 한국대사(왼쪽에서 세번째), 한국 작가를 세계에 소개해온 세레넬라 시클리티라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 등의 모습. 런던=김성탁 특파원

사치갤러리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박은하 주영 한국대사(왼쪽에서 세번째), 한국 작가를 세계에 소개해온 세레넬라 시클리티라 대표(오른쪽에서 세번째) 등의 모습. 런던=김성탁 특파원

 꽃과 조각상이 어우러진 조형물을 만들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확대해 함께 전시하고 있는 박효진 작가도 한국 미술의 실험 정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규 미술교육 없이 독학으로 작품 세계를 이룬 이두원 작가는 내년 5월 서울에서 처음 열리는 전기자동차 레이싱인 포뮬러 E 챔피언십을 기념해 자동차 부품에 호랑이 등 한국적 이미지를 그린 뒤 다시 경주용 자동차 모양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전시했다. 행사에 참석한 박은하 주영 한국대사는 “한국 신진 작가를 사치갤러리에서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 연결 고리가 돼준 주최 측에 한국을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조형물을 만들고 확대한 사진과 함께 전시하는 박효진 작가(오른쪽)가 전시를 후원한 하나은행의 박찬범 런던지점장과 대화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조형물을 만들고 확대한 사진과 함께 전시하는 박효진 작가(오른쪽)가 전시를 후원한 하나은행의 박찬범 런던지점장과 대화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이번 코리안 아이 전시는 KEB하나은행이 후원했다. 세레넬라 대표는 “미켈란젤로도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생존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예술은 후원자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우리 회사는 작품을 팔지 않는 자선 단체이기 때문에 한국 예술가를 해외에 계속 소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후원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