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스럽다" 제보에도···화성 용의자 3번 수사망 빠져나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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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이모(56)씨가 과거 다른 성폭행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 선상에도 올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경찰이 잘못된 혈액형과 족적(신발 크기) 등에 치중하면서 이씨는 3차례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음에도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경기남부청에 마련된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연합뉴스]

경기남부청에 마련된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연합뉴스]

당시 경찰에 깊이 있는 수사를 했다면 처제 사건을 포함, 최소 4명의 추가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26일 브리핑을 열고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6차 사건 때 "이씨 의심스럽다" 제보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1987년 5월 화성 연쇄살인 사건 6차 사건 발생한 이후 "이씨가 의심스럽다"는 주민 제보를 받았다. 이 주민은 "1986년 8월쯤 인근 지역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의 용의자가 이씨인 것 같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경찰은 1986년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면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로 이씨의 이름을 올렸다. 두 사건 모두 성폭력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경찰은 그해 7월 피해자 조사와 이씨의 직장, 마을 주민 등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도 진행했다. 그러나 이씨가 1986년과 6차 사건의 범죄현장에 있었다는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조사를 받는 모습[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한 용의자가 경찰조사를 받는 모습[연합뉴스]

이씨의 이름은 1988년 9월 발생한 8차 사건 이후에도 또 언급됐다. 모방범죄로 확인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경찰은 이전 조사 기록을 재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에 대한 조사가 미진했다고 보고 1988년 말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재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 수사도 진척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90년대 초 인근에서 성폭력 범죄가 발생했다. 경찰은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이씨일 수 있다고 보고 다시 조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잘못된 혈액형과 신발 크기   

하지만 이씨는 번번이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당시 용의자로 추정된 인물의 혈액형과 신발 크기가 이씨와 다르게 나와서다.
경찰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1~7차 현장에선 용의자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1990년 11월 발생한 9차 사건에서 용의자의 정액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피해자의 옷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이 흔적을 통해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특정했다.

6차 사건에서 나온 용의자의 신발 크기는 245㎜였다. 하지만 경찰관들은 당시 비가 와 신발 흔적이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 용의자의 신발 크기가 255㎜라고 추정하고 수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씨의 혈액형은 O형이고 신발 크기도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유력한 증거라고 생각한 혈액형과 신발 크기가 이씨와 다르자 이씨를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사건 7차 사건 당시 용의자 몽타주 수배전단. [연합뉴스]

경찰 관계자는 "이씨를 유력 용의자 중 하나로 보고 깊이 있게 주시하고 있었지만, 당시 용의자가 B형이라는 인식이 퍼진 상태로 수사가 진행되면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과거 수사에 참여한 형사도 이씨의 범행을 입증할 목격자나 증거가 없어 수사망에서 배제했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법 최면 전문가 동원 

경찰은 이씨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씨는 18~25일까지 5차례 진행된 경찰 대면조사에서 모든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과거 사건 목격자들의 진술을 듣기 위해 이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일부 목격자는 현재 사망했지만 7차 사건 당시 용의자와 마주쳐 수배 전단 작성에 참여했던 버스 안내양과 9차 사건 피해자와 함께 있던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을 목격한 남성 등이다.
경찰은 이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법 최면 전문가 2명도 투입했다.

화성 5차 사건 현장 살펴보는 경찰[연합뉴스]

화성 5차 사건 현장 살펴보는 경찰[연합뉴스]

이씨 군 제대 이후부터 미제 사건도 조사 

이씨의 여죄도 수사한다. 이를 위해 1차 사건 피해자가 발견된 1986년 9월 15일 이전인 같은 해 2월부터 7월 중순까지 당시 화성군 태안읍 일대에서 발생한 7건의 연쇄 성폭행 사건 등 화성사건과 그 무렵 발생한 유사범죄와의 연관성을 분석하고 있다.
수사 범위는 이씨가 군대에서 전역한 1986년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검거된 1994년 1월까지이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는 끝났지만, 실제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수원=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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