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줄포 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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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줄포 여자’- 김명인(1946∼ )

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는 지 벌써 이태째,

포장 친 간이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 만의 외출이냐고

한 가족이 아직은 시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짧은 봄날에는 채 못 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시절이 저 여자에게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안에서 쩍쩍거릴 때

목포에서는 한창 잘 나갔지요, 거름을 파고들었던

홍어찜이 이제야 콧속을 탁 쏜다

여기도 예전의 줄포 아니라요, 어느새 경계 넘어버린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봄꽃 피워 문다



희망이 저 앞에서 뚜렷할 때, 시야는 좁아진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에 속고 싶지 않은 어떤 시기가 있다. 그럴 때, 시절은 유독 나에게 가혹한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세상이 훤하게 다 들여다보이기도 한다. <이문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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