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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중국인 30만 명이 즐긴 추사 김정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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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수석 큐레이터는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전혀 예상 못한 북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올 6월 18일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개막한 ‘추사(秋史) 김정희와 청조(淸朝) 문인의 대화’ 특별전에서다. 지난달 23일 폐막을 앞두고 전시 뒷마무리를 위해 그가 다시 찾은 중국미술관에 북한 만수대창작사 소속 작가 10여 명이 나타난 것. 물론 공식 초대는 없었다. 알려진 대로 만수대창작사는 북한 미술 분야 최고의 집단창작 단체다.

베이징 중국미술관 전시 #210년 만의 방중 큰 호응 #북한 작가들도 찾아와 #문화의 생명은 역시 교류

이씨는 짤막하게나마 그들과 얘기를 나눴다. “북한 예술가들도 추사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출품작을 세심하게 보았다. 평소 추사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나.
“만수대창작사 총책 길정태 관장이 인상적이었다. 추상조각을 하고 있다는 그는 추사의 진면목을 꿰고 있었다.”
길 관장이 뭐라고 했나.
“그는 서예가 동양 조형예술의 기본이라고 했다. 본인도 추사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추사의 개성을 ‘변화’ 한마디로 압축했다. 끝없이 달라지는 자기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추사의 일생이 그랬다.”

북한 작가들의 추사전 단체 관람은 이례적이다. 정치·외교의 간극을 이어주는 문화의 역할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이번 추사의 중국 전시가 특히 그랬다. 두 달여 동안 30만 가까운 관객이 찾아왔다. 하루 평균 5000명이다. 중국 측의 공식 집계로, 전통미술 전시로는 대박을 쳤다. 이 큐레이터는 “역대 한국 최고 서예가로 꼽히는 추사라지만 중국인이 과연 그를 알아볼지 걱정이 컸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 여전히 안개 속인 한·중 교류를 감안했을 때 일반 관객이 찾아올지 의심스러웠다. 한데 결과적으로 기우에 그쳤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는 19세기 동아시아를 풍미한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지난달 23일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폐막한 추사 특별전을 둘러보는 중국인 관객들 . [중앙포토]

추사 김정희는 19세기 동아시아를 풍미한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지난달 23일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폐막한 추사 특별전을 둘러보는 중국인 관객들 . [중앙포토]

이번 전시는 추사가 210년 만에 중국에 건너갔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1809년 스물넷 청년 추사는 청나라 수도 연경(燕京·현재 베이징)에 사신으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 중국 땅을 처음 밟았다. 이후 두 달여 연경에 머물며 최신 지식과 학문에 눈을 떴다. 중국 최고의 지식인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을 사사하며 역대 서법(書法)을 익혔고, 귀국 후에도 이를 갈고 닦아 추사체라는 독보적 경지를 이뤘다. 예쁘고 반듯한 글씨를 넘어 기존 서체를 해체한 기괴하고도 생동적인 글씨를 선보였다. 베이징 전시에는 추사의 변모 과정을 보여주는 명작 117점이 출품됐다.

중국 작가들은 추사의 진취성을 높게 샀다. 21세기 현대미술과도 통하는 추사의 선구적 안목에 방점을 찍었다. 세계적 조각가로 이름난 우웨이산(吳爲山) 중국미술관장은 “글씨를 넘어선 그림이다. 심미적으로나 조형적으로 현대 추상”이라고 평가했고, 저명 서예가 황진핑(黃金平)은 “병풍 한 폭, 글자 한 자마다 고풍스러움과 소박함, 기묘함과 생동감이 넘친다”고 감탄했다. 베이징 현장을 다녀온 김규선 선문대 교수는 “한국이란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추사를 동아시아 지평에서 새롭게 조명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번 추사전은 문화계 사건으로 부를 만하다. K팝·드라마 등 대중문화에 제한됐던 한·중 문화교류가 예술·학문 분야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반갑다. 하지만 만만찮은 과제도 남겼다. 우리끼리만 최고라 불러온 추사라는 거대한 콘텐트를 동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 차원에서 어떻게 소통시킬 것인가라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게 됐다. 제2, 제3의 추사를 찾아내야 할 책임도 크다. 눈앞의 한·중 관계가 갑갑하더라도 세상의 숨구멍인 문화 교류마저 막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최악에 빠진 한·일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한·중·일 세 나라만큼 문화적 교집합이 풍부한 지역도 드물기 때문이다.

말년의 추사는 자신의 노쇠한 얼굴을 그린 자화상에 이런 글을 붙였다. ‘이 사람이 나라고 해도 좋고 내가 아니라 해도 좋다. 나이고 나 아닌 사이에 나라고 할 것도 없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독단에 빠질 수 있는 자신을 경계하는 문구다. 개인이든, 지역이든, 국가든 세상 만물은 관계 속에서 빛나기 마련이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있다. 예술의전당은 이번 베이징 전시를 기념하는 귀국전을 내년 초부터 두 달간 연다. 추사가 태어난 충남 예산, 귀양을 간 제주, 노년을 보낸 경기 과천도 함께한다. 4개 지자체의 악수 또한 처음이다. 추사의 찬란한 복귀를 기다린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