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철, 일 프로문단에 적극 참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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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문학평론가 백철(1908∼1985)이 일본프로문단의 맹원으로 활약하며 발표한 작품들이 최근 발굴 공개돼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문학의 순수성 및 인간성을 주창, 이 땅에 휴머니즘문학이론을 정립시켰던 백씨의 동경에서의 계급주의 문학활동에 대해서는 분단체제하에서의 여러 이유로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문학평론가 권령민씨(서울대교수)가 백씨의 동경유학시절 프로시 및 평론을 발굴, 『문학사상』 9월호에 공개함으로써 백씨의 초창기 계급문학활동의 전모가 떠오르게 됐다.
백씨의 동경문단시대는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1927년 「지상낙원」이란 동인에 가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여기서 청춘의 정열적 이미지를 그려낸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하다가 마르크스에 심취하며 좌익학생운동조직에 접근, 1929년 동안 「전위시인」에 가담하면서 일본프로문단에 진출했다.
「전위시인」은 「노동자 농민속으로」라는 슬로건아래 투쟁적인 선동시를 주로 발표한 일본프로시운동의 중요한 동인이다. 백씨는 이 동인지에 「나는 알았다 삐라의 의미를」「9월1일」등 2편의 시와 「프롤레타리아 시인과 실천문제」라는 평론을 발표했다.
2편의 시에서 백씨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성 확립과 단결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9월1일」은 프로시의 독특한 형식인 쉬프레히콜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어 주목된다.
쉬프레이콜은 1920년대 독일·미국 등지에서 민중시운동의 한 방편으로 유행했던, 대중을 상대로 한 집단적 낭송시로 여러명의 낭독자가 등장, 자신에게 주어진 대본을 읽어 가는 극적 구성을 갖춘 시다. 평론 「프롤레타리아시인과 실천문제」를 통해 백씨는 프로시인의 실천의 절박성을 그 계급적인 토대 위에서의 투쟁으로 못박고 있다.
동경문단에서 백씨의 활동이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은 「전위시인」동인의 해체와 함께 새로이 발족한「프롤레타리아 시인회」에 참가하면서 부터다. 「프롤레타리아시인회」는 1930년 9월에 결성된 일본 좌익시단을 망라한 조직이다. 백씨는 이 회의 결성부터 적극 참여, 6인 중앙집행위원 중 유일한 조선인으로 주도적 인물로 자리잡았었다.
그는 이 회의 기관지 「프롤레타리아 시」에 「다시 봉기하라」·「3월1일을 위하여」·「국경을 넘어서」등의 시와 평론「유물변증법적 이해와 시의 창작」등을 발표하며 일본프로문단의 중심적 위치로 떠오르게 된다.
일본 동경문단에서의 백씨 활동은 동경고등사번학교졸업(1931년)과 함께 귀국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백씨는 귀국 후에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카프)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다 프로문학의 예속성에 회의를 느껴 자유주의 문학으로 전향했다.
권씨는 그동안 비밀에 싸여있던 백철의 일본에서의 활동이 밝혀짐으로써 30년대 프로문학의 국제적인 연대성, 특히 카프와 나프(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와의 관계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았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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