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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전작권 전환, 시간이 아니라 조건이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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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

북한의 잇따른 신형 탄도미사일과 방사포 도발이 새벽잠을 깨우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검증 연습이 한창이다. 한·미 양국은 2014년 10월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적정 시기에 안정적 전환’이 기본원칙이다. 양국 대통령은 2017년 6월 첫 정상회담에서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이 조속히 가능하도록 협력한다”고 재확인했다. 우리 군의 숙원인 전작권 전환이 성사되면 한국군 주도의 국토 방위를 실현하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된다. 군의 노력을 응원하는 이유다.

대통령 임기내 전작권 전환 집착 #시간 쫓겨 급하게 처리하면 위험

문재인 정부는 임기 안에 전작권 전환을 이루겠다며 의욕을 보인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시간이 아닌 조건이다. 한·미가 합의한 세 가지 필요조건을 다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첫째 조건은 한국군이 연합방위체제를 주도할 수 있는 ‘핵심 역량’을 갖추는 것이다. 한국군 유형 전력의 부족분은 미국의 보완전력과 지속전력으로 채우면 된다. 그러나 무형 전력은 사정이 다르다. 한국 측 4성 장군이 최고사령관으로서 연합군의 전쟁 준비와 전쟁 수행을 지휘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 준비 활동은 지금까지 미국 측 사령관이 주도했던 위기 관리, 정보 관리, 작전계획 수립, 연습훈련 계획 실시, 교리 발전, 합동지휘통제체제(C4I) 상호운용성 보장 등 6개 분야로 요약된다. 전쟁 준비는 전쟁을 억제하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전쟁 수행은 무수한 마찰과 우연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미군의 지원을 이끌면서 한국군에겐 국가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둘째 조건은 유사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미국 측 전략자산 전개 전에 한국 스스로 탐지·교란·파괴·방어할 수 있는 ‘방위 충분성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한국군 주요 수단인 군사정찰위성, 천궁(M-SAM), F-35 전투기의 실전 배치, 현무 계열 정밀무기 등의 능력 발전과 한·미 작전요소들의 조화로운 협업체계를 숙련하는 노력이 필수다.

셋째 조건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략 환경의 안정이다. 그동안 위장 평화의 막후에서 북핵·미사일 위협이 가중돼왔다. 북한은 비핵화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도발 강도를 높일 것이다. 지난 7월 중·러 공군기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과 독도 영공을 침범하고 일본 공군기까지 가세하는 난동이 벌어졌다. 이런 추세라면 셋째 조건이 요구하는 상황의 논리가 첫째와 둘째 조건이 요구하는 역량의 논리를 지배할 수 있다.

이런 세 가지 필요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전작권 전환을 위한 충분조건을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정부 출범 이후 부쩍 한·미 동맹의 체질 약화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이래 한반도 평화를 지탱해온 전통적 안보 기제들의 건강 회복을 위해 몇 가지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를 비롯한 전략적 소통·협업체계를 내실화하고, 한·미 핵 공유체제 강화로 북핵 위협에 대한 실효적 억제력을 갖춰야 한다. 방위비 분담금의 적정규모를 책정해 주한 미군 주둔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유엔사의 정전체제 관리와 전력 제공 기능의 활성화를 지원해야 한다. 전략 환경 변화에 따라 연합 연습훈련을 적시에 복원하고, 각 군 참모총장에게 작전지휘 책임을 부여해 작전지휘 능률을 보장해야 한다.

한·미 연합지휘관계의 변화는 국가 안위와 직결된다.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처리할 일이 아니다. 미국과의 상호 신뢰 속에서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갖춰 전작권을 안정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군인과 국가』에서 역설했듯이 “군사적 판단이 정치적 편익 때문에 왜곡되면 안 된다”는 경고를 거듭 새길 때다.

류제승 전 국방부 정책실장·한국국가전략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