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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똑똑한 불매운동, 정치는 끼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박사라 사회2팀 기자

박사라 사회2팀 기자

5일 폭염을 무릅쓰고 서울 합정동 인근 ‘재팬타운’을 찾았다. 젊은 층을 상대로 한 일본풍의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온 곳이다. 일본 불매운동 ‘No Japan’(노 재팬)의 여파는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거리가 썰렁했다. 그러다가 한 일식집 주인에게서 예상 밖의 얘기를 들었다.

“손님이 줄기야 했죠. 그런데 알만한 분들은 알아요. 사장도 한국인, 직원도 한국인, 요리 재료도 대부분 국내산인데 보이콧해봤자 애꿎은 사람들만 손해라는 걸.”

‘다이소’ 점장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실 납품업체가 대부분 국내 중소기업이거든요. 손님들이 먼저 인터넷에서 정보를 접하고 와요. ‘이 제품은 국산이니까 괜찮다’고 대화하는 게 들려요.”

한쪽에서 벌어지는 불매 운동 뒤엔 우리 상인이 입게 될 피해를 걱정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온라인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요 커뮤니티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토론이 벌어진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이자카야는 불매에서 제외해야겠죠” “롯데처럼 일본 지분이 있지만 국내에 세금을 내는 기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사놓은 일본 제품은 어떻게 하시나요?”

답변은 다양하지만 “각자의 기준을 존중하자”는 취지의 답이 주류로 자리 잡는 분위기다. “일본 제품 두 개 살 거 하나 사면 되는 거죠” “롯데가 한국 기업이라며 ‘사드 보복’ 당했던 것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같은 답에도 동의가 이어진다.

단순히 일본 여행을 갔다고 돌을 던지듯 비판하는 막무가내식 게시물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런 글이 힘을 잃고 있다.

한 달째를 맞은 불매 운동은 똑똑해지고 있다. 현재의 일본 정부를 싫어하는 것과 일본 자체를 혐오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불매운동의 영향이 누구에게 닿을지 여러 번 고민하면서 시민들은 사례별로 YES와 NO의 범주를 만들고 있다.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건 정치권과 지자체다. 서울 중구는 6일 일본인 관광객이 몰리는 명동과 청계천 일대에 1000여개의 ‘노 재팬’ 깃발을 걸었다가 시민들의 뭇매를 맞았다.

서양호 중구청장은 이날 결국 페이스북에 사과글을 올리고 깃발을 모두 철거했다. 그는 뒤늦게 “불매운동을 국민의 자발적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관광객을 상대로 먹고사는 지역 상인들은 몇 시간이나마 깃발을 보며 걱정에 시달려야 했다. 깃발 제작에 들어간 세금은 되돌릴 수 없다.

여당에서는 “일본 전역을 여행금지 지역으로 확대하자”거나 “도쿄 올림픽을 보이콧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올림픽을 위해 수년을 기다려온 선수들을 미리 생각했다면 나올 수 없었을 발언이다.

한 시민이 중구 홈페이지에 남긴 표현이 눈에 띈다.

“시민이 촛불 집회한다고 정치권이 달려와서 불 지르는 꼴입니다.”

시민운동의 힘은 자발적이고 순수한 참여로부터 나온다. 권력이 이들을 움직이려 한다면 애국이 아니라 관제 운동이 되고 만다. 시민들의 분노에 편승해 인기를 얻어보겠다며 불을 지를 때가 아니다.

박사라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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