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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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각목난투극」, 「타락난무」, 「훅색선전 난무」, 「무법난장판」, 「또난장판」, 「난잡선거」…. 「사생결단」, 「흉기등 무장」,「이전투구」, 「억지·생떼」, 「주먹질·돈봉투」, 「걸레는 빨아도 걸레다」….
지난 닷새동안 신문기사 제목이 영등포을구 재선거를 계기로 비추어준 우리의 얼굴이다. 각당 총재들을 비롯, 경륜을 퍼나가겠다는 엘리트로 자처하는 무수한 정명들의이름과 나란히 뒤섞인 우리시대의 언어들이다.
이처럼 살벌한 말들이 나오게한 장본인은 누구인가. 모두가 나는 아니라고 발뺌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아무도 행위의 실체가 없으니까 TV화면을 통해, 신문을 통해 온국민이 분명히 확인한 사실은 모두 착각이거나 망상일수밖에 없다. 국민 모두가 허수아비놀음을 한꼴밖에 되지않는다.
대중앞에 그들이 기름칠한듯 숱하게 쏟아내는 말들은 모두가 민주·복지·비리 척결등 아름답기만하다. 그러나 겉만 아름다울뿐 논리도 없고 실체도 없는 허상일 뿐이다.
뒷전에서 들려오고 그들이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언어는 모략과 위선으로 뒤범벅된 혼탁하고 황량하며 천박한 것들 뿐이다.
『언어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죽음』이란 문구를 최근 읽은적이 있다. 아무렇게나 쓰이고 있는 동물적인 언어들, 실제 행동과는 동떨어진 가식의 언어들, 가치기준을 상실한 언어들, 자기비판과 자기정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언어들, 이런 언어들이 죽은 언어라는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모든 행동과 말에는 그 사람의 도덕성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렇다면 지굼 우리들앞에 범람하고 있는 언어들은 그들의 도덕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정객들의 말이 현란하기는 비슷한 면이 없는것도 아니다.
의회정치를 꽃피웠다는 영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것 같은 익살로 지금 우리현실과 비교해 봄직한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외국여행에서 돌아온 한 유권자가 하원의원 보궐선거 유세장을 모두 돌아본 친구에게 어느 후보가 가장 훌륭하냐고 물었더니 『4명의 후보중 한사람만 쁩게 한 선거법이 하느님의 섭리인것 같아 감사할뿐』이라고 대꾸했다는 해학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많은 후보중 한사람만 국회의원으로 뽑을수 있게된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영국사람 같은 여유가 있는것일까. 불행히도 그럴 여유가 없는것이 답답할 뿐이다.
아예 이번 보궐선거에 나선 후보를 모두 탈락시키는 법률이 당선자가 결정된 바로 이 순간에 코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4명을 모두 두차례나 선거법위반혐의로 고발했다. 게다가 후보마다 투표가 끝나기전에 선거소송의 홍수를 이루고 있다. 또다시 선거무효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는것이다.
우리사회에는 이런 현실의 탓을 대개 정치무대의 주역들에게만 돌리는 버릇이 있어왔다. 정말 그들만의 책임으로 돌리고 체념으로 끝내도 좋은것일까.
지금과 같은 정치상황을 길러온 토양은 무엇인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닌가. 우리사회와 시대의 산물이 이번 영등포선거의 주역들이다.
오늘날 우리 정치인들의 언어와 사고능력, 도덕성의 결함은 바로 우리들의 결함이기도 한것이다.
또 남의나라 얘기지만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여러명의 후보에게서 금품을 받고 매수당한 혐의로 법정에 선 유권자가 혐의사실을 모두 시인하자 판사가 누구에게 투표할 작정이냐고 묻자 『그건 내 양심의 문제』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자기는 잘못한게 없다는 얘기다. 이 역시 「자기합리화」의 논리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러한 갖가지 허구의 함정에 빠져있지 않은지 모두가 자신을 돌이켜봐야한다. 정치인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고 매도만 할것이 아니라 치열한 자기반성을 할 때다.
그런뜻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이번 선거양상을 두고 『주는것 받고 올바로 찍겠다는 식의 자세가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고 한 유권자들에대한 고언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한다.
부끄러운 과거는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동해시재선거의 악몽이 몇달전인가. 『저주스러운 역사에서 교훈을 받지 못하는 민족은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운명을 감수할수밖에 없다』는 한 철학자의 말이있다. 동해의 악몽은 아득한 역사속의 기억도 아니다. 그런데도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가.
같은 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하기도 하고 부당하기도 하다. 그런뜻에서 며칠전 선거법위반혐의로 자취를 감춰버릴수밖에 없었던 한정당의 광고문구가 아깝다.
어느 특정 정치집단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런 문구를 내놓았던 정당을 포함한 모든 정치인, 시민 모두에게 그 문구는 합당한것 같다.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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