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우대국)’ 제외라는 무역 전쟁 확전이 임박했다. 우리는 미국을 설득하는 데 공을 들였다. 정부·국회·민간 대표단 20여 명이 워싱턴을 연이어 찾았다. 유명희 통상산업본부장,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과 정세균 전 의장을 포함한 국회 대표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민간 대표단이 미 정부·의회·싱크탱크를 전방위로 접촉해 들어갔다. 결론은 한결같았다. “미국이 개입하거나, 중재자가 될 수 없다. 두 나라가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였다.
마크 내퍼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는 지난 25일 만난 한국 의원들에게 좀 더 속내를 드러냈다. 내퍼는 “일본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오래전부터 한·일 갈등에 대해 들었고, 한국 정부와 기업인들도 만나 양국 입장은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 “미국이 한쪽 편에 서서 중재를 한다면 다른 동맹과 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 미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한·일 양국이 대화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역할은 한·일 대화를 촉구하거나 멍석을 깔아주는 정도란 뜻이다. 트럼프식 표현으론 “문 대통령도 좋고, 아베도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의원은 “미국이 중재에 나서야 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미국이 원하는 건 한·일 갈등 와중에 삼성전자나 현대차 공장을 미국으로 이전하기를 원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하루 전 방한한 트럼프 대통령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보고 “도대체 저건 뭐냐.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단한 건물”이라며 대놓고 부러워했던 것이 떠올라서다.
미국이 동맹국의 위기를 이용할 것이란 건 현실적으로 가능성 낮은 기우일 수 있다. 반도체 공장의 입지 선정은 10년 전부터 계획돼야 한다. 오히려 내퍼 부차관보처럼 한·일 갈등에 익숙한 이들에겐 “한·일 문제 개입은 고된 일인 데다, 좋은 결과도 못 본다”는 생각이 박혀있다. 올해 초부터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일 관계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는데도 사태만 악화한 데 대한 피로감도 깔렸다.
결국 우리는 일본의 확전에 오롯이 맞서야 한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가 현실화될 경우 연 200억 달러의 피해 대책부터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밝혔듯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일본 의존을 탈피하는 수입 다변화와 국산화도 불가피하다. 감정적 대응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정치적 결단도 우리 몫이다.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