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현장 국정 '삐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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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국무총리가 집중호우로 피해를 본 지역을 13일 방문하려던 계획을 갑자기 취소했다. 한 총리는 취임 이후 "장관들도 현장에 가 보라"고 수시로 독려해 왔지만 정작 본인은 현장 방문을 미룬 것이다. 재난 관리 주무 부처 장관인 이용섭 행자부 장관은 이날 수해지역을 찾아 나섰다가 봉변을 당했다.

◆ 한 총리, 일정 돌연 취소=한 총리의 수해 현장 방문은 하루 전인 경기 북부에 집중호우가 내린 12일 결정됐다. 지난 주말에 배포된 총리 주간 일정에는 이날 서울 도봉구의 노인 일자리 전담시설인 '도봉 시니어클럽'을 방문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고양시가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노인 일자리 시설 방문은 한가한 일정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 총리는 태풍 에위니아가 강타한 남부 수해 현장에도 가지 않았었다. 총리실은 이날 오후 늦게 일정 변경을 기자실에 통보했다. 노인 일자리 시설 방문 직후 수해 현장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총리실은 수해 현장 방문 계획을 하루 만에 취소해버렸다. 이번 집중호우의 최대 피해지역인 고양시가 한 총리의 지역구(고양 일산 갑)여서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결국 "민생 현장을 찾아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아픔을 감싸주는 총리가 되겠다"던 한 총리의 다짐은 정치논리 때문에 뒷전으로 밀린 셈이 됐다. 한 총리는 이날 노인 일자리 전담시설은 예정대로 방문했다.

◆ 봉변당한 이 장관 =이 장관이 찾은 곳은 고양시 덕양구 행신3동 가라뫼 마을. 17년째 해마다 되풀이되는 수해에 시달리던 이 마을 주민들은 이번 수해 때도 43가구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았다.

오전 7시20분쯤 이 장관이 현장에 도착하자 마을 주민 40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 장관은 먼저 침수된 문화빌라의 한 반지하방에 들어갔다. 물에 잠겼던 처참한 현장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40대 여성은 이 장관에게 "대책도 안 세우면서 뭐하러 왔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이 장관은 현장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왔다. 밖의 상황은 더 험악했다. 피해 주민들은 "정부가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아 해마다 크고작은 침수 피해를 보고 있다"며 거세게 비난했다. 특히 아줌마들은 큰 소리로 "정부가 하는 게 뭐냐"며 삿대질까지 했다. 이 장관은 20분 만에 황급히 현장을 떠나 고양시청으로 향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일부 주민들의 항의는 있었지만 이 장관이 현장 주민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었고, 고양시청에서 피해 복구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최현철 기자, 고양=정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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